ファイナルファンタジーI・II

파이널 판타지 I・II 어드밴스 (2004 GBA)

 

본래 1987, 1988년 패미컴으로 발매된 파이널 판타지 I, II편의 리메이크. 워낙 리메이크가 많이 된 덕분에 뭐 어느걸 잡을지 고민되기도 했는데, PSP판에 추가되는 요소들은 그저 무한의 노가다를 요구하는 야리코미에 지나지 않는데다 그래픽적인 업데이트를 한 건 좋은데 너무 미묘하게 선명하고, 그렇다고 PSP 세대 게임에 준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그래픽이냐면 그것도 아니라 레트로도 아닌 것이, 모던도 아닌 것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난 딱 이 정도 수준의 리메이크가 플레이하기 불편하지 않으면서 레트로한 분위기가 남는 것 같아서 좋다.

 

 

 

 

 

파이널 판타지

 

일단 1편부터. 어디서 굴러먹던 1레벨 쪼랩들이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빛의 용사의 증표라는 크리스탈이란 것을 코르넬리아의 왕에게 보여주고 우리가 전설의 용사라며 약을 파는 데서 시작한다. 사실 처음엔 패미컴판을 하려고 했는데, 2시간 정도 만져보았지만 플레이하기가 꽤 괴로운 버전이었다. 일일이 언급하면 끝이 없으니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 마법이나 아이템의 효과를 게임 내에서 알려주는 텍스트가 없다. 매뉴얼 필수
  • 여관에 숙박하거나, 필드에서 아이템 텐트를 사용해 숙박하지 않으면 세이브를 할 수 없다
  • 장비를 구입할 때 누가 장비할 수 있는가 및 패러미터 상승/하강이 표시되지 않는다
  • 전투중 타게팅을 한 적이 먼저 쓰러졌을 경우, 다른 적을 자동으로 타게팅하는 게 아니라 미스처리된다
  • 일판 한정으로, 리메이크판은 가나로만 표기되는 게 아니라 한자병용을 옵션에서 선택할 수 있다

리메이크판의 UI는 SFC 시리즈들과 같은 형식으로 정리되었다. 패미컴에서는 장비를 1인당 최대 4개까지밖에 소지할 수 없는데, 4개가 채워진 상태에서 상자에 있는 장비를 꺼내려고 한다면? 단순히 소지장비가 가득 차 있다는 메시지가 출력되고, 그 상자에 뭐가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으니 뭐가 나올 지 모르는 상태에서 복불복으로 소지 장비를 하나 버려야 한다... 초반에야 별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게임은 최후반 던전에서도 극초반에나 쓸 허접한 장비들을 상자에 배치해 놓는 게임이라 은근히 문제가 된다.

 

또, 패미컴판은 마법을 사용할 때 MP가 있는 게 아니라 클래스 별로 사용가능 회수가 정해져 있는데, 이건 단점이 아니라 그냥 특징이다. 올드스쿨 RPG에서는 흔히 쓰인 방식인데, 요즘은 그리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아서 아쉽다. 이것이 리메이크에서는 MP 시스템으로 변경되었는데, 덕분에 MP가 허락하는 한 최상급 주문을 계속 난타하고, 에테르를 만땅으로 구입해 밀어붙이는 게 가능해져 초급단계 주문들의 비중이 줄어들게 된다. 그 대신 적, 특히 보스몹의 강화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MP 시스템이 직관적이고 관리하기 쉬운 건 사실이지만, 유일하게 리메이크에서 개선으로 느껴지지 않는 부분. 좋게 말해도 옆그레이드.

 

 

 

동시대 게임인 초대 드래곤 퀘스트와 비교하면 차별화를 시도한 정도가 아니라 발전된 요소를 많이 보여준다. 배, 카누, 비공정 등 다양한 탈것의 등장과 B+셀렉트를 누르는 것으로 세계지도를 확인할 수 있는 점, 초반의 스토리 퀘스트를 진행할 때 힌트 시스템이 존재하는 점(코르넬리아 마을의 댄서) 등 여러 면에서 DQ를 넘어서려 한 모습이 보인다. 패미컴판에서 세이브 지점이 한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반드시 스타트 지점인 라다톰의 왕까지 돌아가야 세이브가 가능했던 드래곤퀘스트 I에 비하면 마을별로, 혹은 아이템을 사용해 필드에서 세이브가 가능해졌다는 점 등도 분명 발전점이고, 세계지도 화면에서 주요 지점이 밝은 점으로 표시되는 만큼 드래곤퀘스트 2처럼 대체 내가 뭘 찾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맵을 탐사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스토리 진행을 위해서도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만큼 이제 뭘 어쩌라는 거냐는 막막함이 없다.

 

다른 특징은 캐릭터 메이킹. 직업과 이름을 정하는 것이 전부긴 하지만, 처음 시작과 함께 4인파티를 스스로 만드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PC용 롤플레잉 게임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던 시기라고 해야 하나. 특히 울티마 III. 디폴트로 게임에서 설정되어 있는 파티는 전사, 시프, 백마술사, 흑마술사인데 - 다른 클래스가 있긴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밸런스 잡힌 파티 아냐? 라는 생각에 나는 그대로 진행했지만, 이 글 쓰면서 알아본 결과 시프가 잉여라는 걸 알았다(...) 시프 자체의 딜이 크게 딸리는 건 아닌데, 사용 가능한 장비의 폭이 좁은데다 시프만이 가능한 특수한 커맨드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굳이 시프를 기용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뭐, 그래도 시프를 넣는다고 게임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스토리는 you hero, save world 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게임의 페이싱 조절이 잘 되어있고 파트 구분이 깔끔하다. 여기서부터는 일단 리메이크판 한정으로 이야기한다.

  • 튜토리얼로 세라공주를 구하고 나면 오프닝이 나오고, 나머지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열린다.
  • 다리를 건너면 배를 얻게 되는데, 전세계가 동시에 열리는 게 아니라 절반 정도만 접근 가능하다.
  • 니트로 이벤트로 운하를 뚫게 되면 내해와 외해가 연결되며 나머지가 개방된다.
  • 마지막으로 비공정을 얻게 되면 그동안 배를 댈 수 없어서 가지 못했던 곳들에 다다를 수 있다.

각 파트의 길이가 비슷비슷하고, 갈 수 있는 장소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벤트에 필요한 힌트도 쉽게 모이게 된다. 리메이크에서는 세계지도에 이미 방문한 지역에 레이블이 붙어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만큼 니미럴 그게 어디였더라 하며 헤멜 필요가 없고, 경쾌한 페이스의 빠른 진행이 가능하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인카운터율이 지나치게 높다. 리메이크판 기준으로 각종 아이템을 최대 99개까지 들고다닐 수 있는 시리즈 전통에 따라 포션, 하이포션을 99개씩 싸들고 다닌다고 해도 딜을 담당하는 흑마도사의 MP가 줄어드는 건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다. 하이포션은 HP 150을 회복시켜 주지만,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MP 회복약 에테르는 50밖에 회복시켜주지 않는데, 후반에 얻게 되는 공격마법 블리자가는 1번에 MP 40, 플레어는 50을 그대로 가져간다. 에테르가 비싼 건 아닌데, 99개를 챙겨서 출발한다 해도 던전이 워낙 넓고 인카운터가 잦게 발생하다 보니 포기하고 탈출하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후반으로 가면 던전에서 바로 탈출할 수 있는 마법을 배울 수 있지만 초중반에는 그마저도 없고, 무엇보다 에테르를 구입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후반이다. 초반에는 열심히 뺑이치며 살 수 있는 아이템을 최대한 쟁여놓고, 레벨을 올려 최대한 MP를 아껴가며 보스에 다다르는 플레이가 된다.

 

대신 보스전의 난이도가 그리 높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맵을 메모해가면서 진행했기 때문에 그나마 덜 헤메긴 했는데, 그래도 충분히 랜덤 인카운터와 넓은 던전에 단련된 덕분에 중반 이후 레벨이 딸린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았다. 던전도 구조가 딱히 복잡하거나 미로지옥이거나 던전마다 기믹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닌 만큼, 일단 매핑하고 최단거리 동선을 파악하면 탈출해 나왔다가 다시 재공략을 할 때 원래의 위치까지 돌아가는 것도 금방이다. 던전 구석구석을 체크해야 장비가 충실히 갖춰지는 만큼 초반에 레벨이 모자라거나 아이템이 모자란다면 2번에 걸쳐 한 번은 루팅, 한 번은 보스공략을 노리고 도전하는 것도 방법. 다만 후반으로 가면 돈이 썩어나게 되니 그쯤 오면 아이템의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아무래도 원작이 8비트 시대 게임인 만큼 텍스트의 양이 적고, 주인공들이나 NPC들의 캐릭터성을 부각시켜 줄 이벤트는 아예 없다. 나는 어째 클리어한 다음에도 내 파티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니.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타임루프라던가 제법 복잡한 설정들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텍스트 분량의 한계 때문에 잘 전달되지 않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인다. 물론 텍스트를 쟁여넣을 수 없는 건 패미컴 시대 게임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메도 불구하고 그 스케일이 크고 아름답다. 화산, 해저, (아마도) 우주, 타임머신까지 DQ와 달리 정통파 소드 앤 매직 판타지이길 전력으로 거부하는 'FF다움'이 1편부터 느껴진다. 단순히 DQ의 아류이길 거부하기 위해 차별화를 했다기보다, 초기 울티마의 영향이 아닐까 싶은 건 내 기분탓일까.

 

FF1은 스토리를 즐기는 RPG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역으로 90년대 중반 이후의 RPG들에서 너절하게 긴 대화씬이 피곤하고 단순히 게임만을 즐기고 싶을 때는 오히려 최적의 선택이 될 수 있다. 플레이 타임이 딱히 긴 것도 아니고, 시작하며 클래스 선택과 파티 구성을 달리하는 것으로 새롭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회차 플레이를 하기도 적절하고, 리메이크판의 추가 던전들은 충분한 야리코미 요소를 갖고 있다.

 

 

 

 

 

파이널 판타지 2

 

초대 파이널 판타지는 1987년 12월 18일에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그리고 그 후속작은 1년이 지나기 딱 하루 모자란 1988년 12월 17일에 발매된다. 초대 파이널 판타지가 스퀘어가 망하기 직전에 최후의 작품으로 기획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2편이 기획부터 제작과 발매까지 얼마나 바쁘게 만들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 작품 대박나고 물 들어올 때 노 젓다 나온 작품이란 점에선 드래곤 퀘스트 2와도 공통점이 있는데, 그나마 기존 시스템을 계승하며 확장한 DQ2와 달리 FF2FF1의 거의 모든 것을 뒤엎는 야심작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FF2는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RPG들과 비교해도 굉장히 이질적인 작품이다. 텍스트의 분량이 늘어났고, 단순히 퀘스트를 받아 해결하며 진행되던 전작에 비해 시나리오성이 강조되었다. 주인공 파티는 단순히 플레이어의 분신이나 장기말이 아니라 각각 배경과 스토리를 가진 캐릭터로 조명되고, 이러한 요소들은 이후 JRPG로 이어지지만 FF2는 다른 JRPG에서는 보기 힘든 이질적인 시스템들이 추가로 만들어져 있다.

 

그 중 하나는 대화 키워드 시스템. 단순히 대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중 습득하게 되는 시나리오의 주요 키워드에 대해 묻거나, 아이템을 보여주며 대화의 주도권을 플레이어에게 주는 것. 초반에 핀 마을의 술집 마스터에게 그냥 말을 걸면 별다른 힌트를 주지 않지만, 그에게 특정 키워드를 주면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식이다. 역시 울티마, 특히 4편 이후를 떠오르게 하는 시스템인데, 아이디어는 좋지만 키워드의 가지수가 그리 많지도 않고 들을 수 있는 대화의 패턴도 얼마 안 된다. 개발기간의 문제인지, 패미컴 카트리지 용량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이 좋지만은 않았는지 그나마도 리메이크판에 오면 대부분 생략된다. 원작에서 주요 힌트를 주지 않는 NPC들에게 키워드를 제안하면 모든 키워드에 ? 로 밖에 반응하지 않던 것이, 리메이크에서는 뭔가 대사가 준비된 NPC에게만 키워드를 제안할 수 있게 된 것.

 

다른 하나는 독특한 성장 시스템. 이 게임에는 클래스나 경험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전투중의 액션에 따라 캐릭터의 성장 방향이 달라지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마법을 생까고 그냥 물리전투만 하다 보면 힘과 무기 숙련도가 오르지만 지성이 점차 떨어지고, 반대로 마법만 쓰면서 싸우다 보면 마법이 더 강해지지만 반대로 힘이 서서히 떨어지는 식이다. 데미지를 실제로 받아야 HP와 체력이 상승하고, 전투중에 마법을 사용해 MP를 소모해야 최대 MP가 상승한다. 즉 모든 캐릭터에 마법을 가르칠 수 있지만 마법 숙련도가 낮으면 그 효과도 낮고, 무슨 장비든 쓸 수 있지만 검 숙련도는 높지만 도끼 숙련도가 낮은 캐릭터에게 단순히 공격력이 높다는 이유로 새로 얻은 도끼를 장비시켜주면 손에 익지 않은 무기에 계속해서 미스를 찍는 모습을 보게 된다.

 

덕분에 캐릭터 육성의 자유도가 높지만, 반대로 각잡고 하려면 잔인한 노가다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특히 수십종에 달하는 마법들을 하나하나 숙련하는 건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며, 최종마법인 알테마를 습득했다 하더라도 이걸 다시 숙련하지 않으면 초반부터 사용해 온 파이어, 블리자드, 썬더만도 못한 위력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패미컴 원작에선 그 알테마가 버그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패미컴으로 거기까지 진행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버그가 아니라 프로그래머가 '과학도 계속해서 발전하듯 마법도 발전했을 텐데 고대의 마법이 현재의 마법보다 강할 리가 없다'는 이유로 일부러 낮게 설정했다는 말도 있다.) 다행히 그렇게 귀축한 난이도는 아니니 기분대로 진행해도 되긴 한다.

 

 

 

기획의 대담성은 시나리오에도 이어진다. 시작과 동시에 제국군의 추격을 받아 전멸하는 파티, 어찌어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처음에는 이 제국에 대한 반란군에 가담하는 것 조차도 거부당하는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물론 그런 일반인들이 나중에는 초특급 에이전트이자 반란군의 주력이 되지만. 처음부터 태생이 특이하거나, 무슨 예언된 용사이거나, 적어도 무슨 훈련이라도 받았거나 한 것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는 이 컨셉은 오히려 FF1이 아니라 이 게임을 먼저 북미에 내놓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평범한 시민이 불의에 맞서 무기를 들고 일어선다, 딱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컨셉이잖아. 물론 한참 나중에 리메이크판이 해외발매도 되지만 리메이크판은 어디까지나 리메이크판이고.

 

도중에 파티에 일시적으로 가담하는 조력자 NPC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죽는다. 스토리의 진행에 따라 멀쩡하던 마을이 제국군의 폭격으로 파괴되는 모습을 보이고, 더 지나가면 텅 빈 마을들까지 등장하게 되며, 일본게임 특유의 이 새끼들이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꺄꺄거리는 전개와는 확연히 차별된 모습을 보인다. FF6 같은 식이었다면 이렇게 중간에 합류하는 동료들이 이탈하거나 교대하는 일은 있어도 영구 로스트 되지는 않겠지만, FF2에서는 영구 로스트되고 매번 남겨진 파티원들의 묵념을 볼 수 있다. 보코스카 워즈와 함께 패미컴 시대에서 전쟁을 가장 진지하게 다룬 작품 중 하나로 거론해도 좋지 않을까.

 

 

 

다만 중후반 이후의 스토리는 아쉬움을 남긴다. 초반에 주인공들은 정체를 숨기고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는데, 제국군의 미스릴 무기에 대항하기 위해 미스릴을 확보한다던가, 제국의 초거대 비공정 "대전함"을 파괴하기 위해 내부에 잠입한다던가 하는 부분까지는 스타워즈스러운 느낌을 받으면서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전개를 보이는데, 그 이후로는 어째선지 정면에서 치고 들어가 힘으로 압도하는 전개가 되는데다 중후반의 미션들도 스토리상 어설픈 면모를 보인다. 일례로, 반란군을 지휘하는 건 초반에는 힐다 왕녀, 나중에는 고든 왕자와 함께 지휘를 맡게 되는데, 이후 힐다가 납치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고든 왕자는 일행에게 힐다를 구출할 것을 지시하면서, 본인도 함께 따라오겠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그럼 반란군의 지휘를 맡는 건 누구? 그 시점에서 파티에 있던 동료 중 하나 레이라가 이를 맡게 된다. OK. 그런데 그 레이라는 본래 일행을 함정에 빠트려 강도질을 하려 했던 해적 출신이다. 레이라를 반란군에 가담시키는 것 자체는 좋다고 해도, 본래 범죄자 출신의 외부인사에게 군통수권을 넘긴다는 게 말이 되냐? (하긴, 그렇게 개념이 없으니 힐다도 고든도 애초에 나라를 말아먹고 반란군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제국군이나 반란군이나 그 행동원리가 이상하다. 초반에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세계의 7할 정도는 이미 점거한데다, 미스릴 장비로 무장해 양으로도 질로도 모자랄 것이 없어야 할 제국군이 뭐가 아쉬워서 대전함이라는 거대 비공정에 집착하는가? 거함거포주의? 반란군도 반란군대로, 궁극의 마법이라는 알테마를 얻기 위해 힐다의 측근인 백마도사 민우를 희생시키고, 동시에 어느새 반란군 최중요 정예로 성장한 플레이어 파티를 투입하는 모험을 굳이 하는 이유가 뭔가? 상대가 가지지 못한 막강한 비밀병기 하나로 전세를 뒤엎어 보겠다는 발상이 참 일본스럽다.

 

게임 이야기로 돌아와서, 페이싱. 전작만큼 깔끔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굳이 몇 가지 지적하자면 탈것, 특히 카누의 입수시점이 너무 빠른 인상이 있고, 배를 입수한 뒤 세계가 확 넓어지지만 FF1에서 단계적으로 해방된 것에 비하면 탐사해야 할 곳은 갑자기 늘어나는 데 비해 이벤트 포인트의 밀도는 낮다. 게다가 월드의 디자인이 심하게 변태적이라, 어딜 가려고 해도 지구 한바퀴를 돌아야 하는 긴 동선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드래곤 퀘스트 2와 비교하면 B+셀렉트로 세계지도를 불러올 수 있는 시스템이 있고, NPC와의 대화를 통해 다음 행선지의 힌트를 얻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는 점에서 훨씬 진행이 편하다. 주요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반란군의 본거지에 있는 NPC들의 대사도 달라지기 때문에 이들의 대사를 체크하면 적어도 어느 방향을 체크해야 하는지 정도의 힌트는 얻을 수 있고, 리메이크판의 지도에는 아직 미방문인 장소도 빛나는 점으로 표시는 되기 때문에 더 수월하다.

 

대부분의 던전은 배배 꼬인 미로나 트릭이 별로 없이 알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 하나하나 매핑해가며 진행할 필요가 없다는 건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대신 데드엔드로 이어지는 문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데, 어떤 문으로 들어가면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이 드러나고, 어떤 문으로 들어가면 아이템이 있고, 어떤 문으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없는 빈 방. 그런데 이 빈 방들의 인카운터율이 매우 높은데다, 바로 되돌아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 화면이 전환되면 이미 3~4보 안쪽으로 들어간 상태이기 때문에, 걸어 나오다 보면 2~3번 정도 인카운터를 겪게 된다. 그냥 꽝인 걸론 부족해서 일부러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그래도 단지 장소 A에서 장소 B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뿐인 던전은 없고, 어느 던전이든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공략하게 된다는 점이 좋다. 목적이 없이 단지 지나가는 길에 놓여진 던전은 내겐 던전이 아니라 그저 귀찮은 방해물로밖엔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그 던전들 중 시나리오 아이템 회수를 위해 방문하게 되는 곳들 중에는 아예 보스가 없는 곳들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김빠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던전의 막층이니까 어쨌건 보스를 배치하고 보는 것도 안일한 디자인이지.

 

GBA 및 이후 리메이크판은 도중에 죽은 동료들이 저승에서 주인공 일행을 돕는 추가 스토리가 들어가 있다. 취향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완벽한 사족이니 플레이하지도 않았다. 난 FF2 시나리오의 매력은 바로 그렇게 용서없이 죽어나가는 동료들과 그에 따른 비장함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래서는 그 매력을 깎아먹을 뿐. 죽는 캐릭터는 죽기 때문에 유의미하고, 여운을 남기는 거니까. 다만 본인이 그런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유리멘탈이라면 이 리메이크판의 추가 시나리오가 위안이 될 지도 모르겠다.

'Toponym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쿠라대전 1&2  (0) 2024.02.08
스플래터하우스  (0) 2024.02.08
마도물어 I: 3개의 마도구  (0) 2024.02.08
도어도어  (0) 2024.02.08
비기너스 가이드  (0) 2024.02.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