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단간론파 V3: 모두의 살인 신학기 (2017)
재능 있는 고교생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서로 살인게임을 시키는 정신나간 게임 단간론파 메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이후 해피 단간론파 S 초고교급의 남국 주사위 합숙 이라는 게임이 발매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외전이라 할까, 팬디스크격인 게임이니 정식 시리즈는 여기가 현재 마지막, 단간론파 시리즈의 피날레라 할 수 있다. 한국 발매가 추진되었다가 심의거부로 발매가 중지된 걸로도 유명한 게임.
전작들의 배경이 키보가미네 학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비해 본작에서는 사이슈 학원이라는 새로운 배경으로 교체되었고, '초고교급'이라는 설정도 살짝 달라 본래 이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게 아니라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초고교급' 이라는 이명이 붙는,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고교생들을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간에 납치당하고, 데스게임이 강요된다. 그러나 배경이 바뀌었다고 해도 제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전작들에 대한 지식, 특히 초대 단간론파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전작들과 공통된 부분들은 최소한으로 설명한다.
시나리오 진행을 위한 이벤트 컷신을 지나면 등장인물들과의 친목질을 위한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이후 누군가가 시체로 발견되면 범인을 찾기 위한 수사 파트로 들어간 뒤 수사 파트의 모든 플래그를 만족시키면 '학급재판'을 통해 증거를 주고받으며 범인을 밝혀낸다. 학급재판에서 범인이 정확히 지목되면 그 범인만 사형, 만약 잘못 짚으면 범인을 제외한 모두가 사형되고 범인은 데스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다.
전작인 슈퍼 단간론파2의 소개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렇게 자극적인 소재와 반전을 무기로 하는 작품은 전작에서 사용한 패턴을 재탕할 수 없다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슈퍼 단간론파2에서는 초대 단간론파에서 반전 포인트였던 내용들을 초반부터 까버리고 거기에 새로운 반전을 넣어 마무리지었다. 그렇다면 V3에서는? 이걸 다시 뒤집는다는 게 가능할까? 결론은 가능했지만 거기에 대한 유저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하술하겠지만 시리즈 전체를 부정하는 듯 보이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 스펙타클 크립으로 인해 전 시리즈 중 가장 판타지성이 강하고 연출이 화려해진 건 덤.
아나그램을 비롯 귀찮은 미니게임이 늘어난 건 좀 거슬리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학급재판 전반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초대 단간론파에서는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이 주인공 나에기를 비롯 토가미, 키리기리 정도였던 데 비해 슈퍼 단간론파 2에서는 두뇌형 캐릭이 아니더라도 감으로 한두마디씩 하는 것에 주인공이 편승하기도 하고, 또 다른 캐릭터들이 주인공의 발언에 반론을 걸어오면서 더 카오틱하면서도 다이나믹한 전개가 되게끔 했고, 여기에 V3는 이 면에서 더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패닉 변론. 여러 인물들이 동시에 떠들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고 상황에 맞는 발언을 저격해야 하는데, 때로 목소리 큰 놈들이 장면을 지배하며 다른 캐릭터들의 발언을 묻어버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전편들로부터 이어지는 사일런서를 이용해 해당 발언을 약화시키고 내가 필요한 대사를 찾아야 한다. 게임 특성상 후반으로 갈 수록 등장인물의 수가 줄어들어 한산해지기 쉬운 학급재판에서 어쨌건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른 하나는 변론 스크럼. 등장인물들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릴 때 모노쿠마가 트리거하며, 같은 편에 있는 캐릭터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의견 제시와 반박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덕분에 학급재판에서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캐릭터들도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비출 수 있게 해 준다. 이 기능이 꽤 인기가 있었는지 전작이나 다른 시리즈 등장인물로 스크럼을 시키는 2차창작도 종종 보인다. 반대편의 주장을 듣고 그 발언에 포함된 키워드를 선택하면 우리편의 누군가가 대신 반박발언을 하고, 전부 성공시키고 나면 버튼연타로 상대편 주장을 밀어낸다. 버튼연타는 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마지막은 아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위증이다.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지금 혐의가 몰리고 있는 인물이 결코 범인일 수 없다고 주인공이 확신할 때 발동을 요구받고, 그 외에 진행을 위해 필요하지는 않지만 특정 순간에 위증을 할 때 보이는 숨겨진 이벤트도 있는 모양이다. 위증이 필수인 구간에서는 BGM이 살짝 달라지기 때문에 그걸 듣고 판단하는 것도 가능한 것 같긴 하지만 난 아무래도 막귀라 그 정도까지는...
이 위증은 개인적으로 단간론파 V3의 메인 테마인 진실 vs 거짓을 상징하는 요소라 생각한다. 만약 전작들에서 주인공이 단지 누군가에게서 혐의를 벗기기 위해 위증으로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려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초대라면 토가미나 키리기리, 슈퍼라면 나나미나 코마에다 정도가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하지만 V3에서는 애석하게도 주인공이 폭주하면 막아줄 인물이 없기도 하고, 주인공이 전작 주인공들처럼 '진실'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V3의 문제점이자 장점 중 하나가 드러난다. 이전 시리즈에는 추리나 증거로 주인공을 서포트하는 인물(키리기리, 나나미) 및 주인공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지만 재판에서는 필요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는 인물(토가미, 코마에다)이 있어 재판의 많은 부분이 주인공, 조력자, 라이벌 3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V3에서는 서포터 역할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고 케바케로 변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라이벌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물도 평소에는 팔짱끼고 구경하는 것 같다가 자기 기분에 따라 재판을 아예 지배해버리는 등 편차가 크고 기본적으로 '여기서는 손을 잡자' 같은 분위기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는 꼭 학급재판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시나리오에서도 드러난다. 초대에서는 키리기리와 오오가미, 슈퍼에서는 코마에다 정도를 제외하고 이 '살인게임 자체를 끝낸다'는 의도로 모노쿠마에게 정면도전하는 인물이 없이 그냥 최대한 몸을 사리자, 하지만 살인이 발생한다면 피해를 어쨌건 범인을 찾아 모두가 전멸하는 건 피하자... 정도의 멘탈리티였다면 V3의 인물들은 훨씬 행동적이다. 성공, 실패를 떠나 최소 아카마츠, 아마미, 오마, 요나가, 사이하라의 5명이 나름 자신의 방식으로 살인게임 자체를 저지하려 했고, 1장에서의 발언을 보면 호시 역시 이 목록에 넣을 수 있을 지 모른다.
문제는 단간론파는 6장 구성이고 초반에 탈락하는 인물들은 제대로 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이탈해 버리며 플레이어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초대 단간론파를 하면서 쿠와타가 거기서 살아남았다면 하고 아쉬워할 사람은 쿠와타의 소수 팬들 뿐이겠지만 V3를 하면서 아마미나 아카마츠가 살아남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오히려 안해 본 사람이 적지 않을까?
여기에 주인공인 사이하라가 주변을 휘어잡을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심약한 편이기 때문에 주변에 끌려다니는데 제대로 된 서포트도 없이 혼자서 학급재판을 캐리하는 듯 보이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초대 키리기리처럼 '나에기군, 이정도 말했으면 알겠지?' 하면서 떠먹여주는 존재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을만한 대상이 후반까지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재판에서 좀 예리한 발언을 한다 싶은 인물들이 하나하나 탈락하고 최종 생존자들 중에 재판의 서포터가 되어줄 수 있을만한 인물은... 아쉽게도 없다. 반대로 사이하라는 학급재판에서는 맹활약을 하지만 일반 시나리오 파트에서는 병풍이다.
다른 불만점을 말하자면 이번에 추가된 모노쿠마즈의 존재. 모노쿠마의 자식이라는 설정인 것 같고 V3 고유의 마스코트 캐릭터가 필요해서 들어갔다고는 하는데, 이놈들이 등장하는 장면의 90%에서 이놈들의 대사는 들을 필요조차 없다. 정말 대부분의 장면에서 이놈들이 없어도 스토리에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모노쿠마는 어쨌건 흑막의 대리인인 만큼 모노쿠마가 등장해 떠드는 장면에서도 흑막의 캐릭터성을 보여준다는 역할을 하는 데 비해 모노쿠마즈는 그마저도 아니고,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주제에서 계속 탈선하고, 게다가 다섯이나 되는 바람에 자기들끼리 떠들며 플레이시간을 갉아먹는다. 그것도 가끔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전작에서 모노쿠마가 나타나 한마디 하는 템포로 나타나 한마디가 아니라 다섯마디를 하고 지나가니 이놈들이 등장할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전체적인 템포에서도 아쉬움을 느끼는데, 2, 3장까지 제법 복잡한 트릭을 보여주면서 전개가 고조되다가 4장에 들어오면 기운이 빠진다. 4장의 사건은 일종의 가상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만큼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분석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데, 생존자들 중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키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핵심적인 증거 발견을 전부 모노쿠마즈에게 일임시키며 사건의 진상이 너무 쉽게 추리되게 한다. 뭐, 어떻게 생각하면 그나마 모노쿠마즈가 존재의의를 가지는 유일한 장면이라 할 수 있을까.
추가로 위에 언급한 대로 주인공과 협력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인게임을 끝내고자 하는 인물들은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들의 계획이 가동되어 앞으로 어떻게 되나 볼 무렵에는 죽어 있어 미완성의 스토리가 계속 이어진다. 사실 이것도 주인공을 그저 16명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제3자 입장에서 본다면 나쁘지 않은, 군상극적인 전개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플레이어는 그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태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뭔가 전개가 되려나 싶으면 좌절되고, 전개가 되려나 싶으면 좌절되는 것. 발단-전개-위기-전개-위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개인적으로 라이벌 캐릭터로 등장하는 요나가나 오마 둘 중 하나가 처음부터 빠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둘 다 전작의 라이벌들과는 다른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데스게임을 끝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데, 한 챕터에서 둘이 동시에 행동에 나서면 스토리가 너무 꼬일테고, 그래서 하나가 리타이어한 뒤에 다른 하나가 계획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한정된 분량 속에서 스토리가 압축되고 플레이어 입장에서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자세한 걸 네타바레할 생각은 없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난 V3의 엔딩이 충분히 나올 만한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단간론파 메인 시리즈 3작품 공통적으로 마지막으로 밝혀지는 진실은 한마디로 '너희는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다'이다. 이 진실을 마주한 인물들이 멘붕에 빠지고, 영원히 그 갇힌 공간에서 살아갈 것인가 그래도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것인가가 3작품 공통 6장의 내용이다.
그런데 상기했지만 이렇게 반전에 반전을 반복하는 걸 주 무기로 하는 작품에서는 이미 전작에서 사용한 반전을 재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류사상 최대최악의 절망적 사건도 신세계 프로그램도 쓸 수 없다. 그러면 대체 뭐가 남을까? 이 상태에서 시나리오 라이터들이 머리를 쥐어짜 낸 결론이 V3라고 한다면 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 단간론파라는 시리즈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듯한 발언은 팬들로서는 불쾌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정식 4편이 나온다면 하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단간론파는 이미 스펙타클 크립이 한계에 달해 있는 작품이었고, 세계관 리셋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해도 그걸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이미 전작들을 통해 볼 거 다 본 상태라면 '시리즈가 반복될수록 신선미가 없다'는 쓰라린 평가만 남을 뿐이지 않을까? 오히려 박수칠 때 떠난 좋은 예시일지도 모른다.
아, 하지만 어찌됐건 '더 이상은! 단간론파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라고 외치는 듯한 시나리오 라이터의 감정은 잘 전해졌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이런 싸이코틱한 게임을 매일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쥐어짜다 보면 번아웃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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