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darność

솔리다르노시치 (1991)

 

솔리다르노시치는 P.Z. Karen에서 제작한, 계엄령이 내려진 1981년 12월의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정치 및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폴란드의 민주화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가 이끈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Solidarność)'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투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민주화 운동의 리더가 되어 폴란드의 각 지방에서 연설회, 포스터, 찌라시 등의 수단을 동원해 민중의 지지를 얻고 이후 라디오나 TV방송을 하이재크하거나 직접 파업과 시위대를 조직하게 된다.

 

P.Z. Karen은 폴란드의 개발사로, 이 스튜디오의 게임은 모회사인 로지컬 디자인웍스의 퍼블리싱 레이블인 '캘리포니아 드림즈' 명의로 1987년에서 1991년 사이에 발매되었다. 동유럽의 회사가 캘리포니아 드림즈란 레이블을 쓴 건 이 회사가 폴란드계 미국인 루치얀 벤첼(Lucjan Wencel)에 의해 처음부터 미국시장에 유통하기 위해 세워진 회사로 개발팀만 폴란드에 놓고 있었기 때문. 개발한 게임들은 대부분 카지노나 보드게임 종류의 단순한 게임들이지만 이 게임만은 예외이다. 

 

상기한대로 폴란드에서 자국의 정치상황을 소재로 만든 게임이지만 제목을 제외하면 전부 영어로만 되어 있는데, 본래는 폴란드 민주화의 리더였던 레흐 바웬사를 주연으로 한 헐리우드 영화 개봉과 함께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영화 기획이 취소되며 게임도 함께 엎어져버렸다고 한다. 페이지 상단 오프닝 화면의 V자 제스처를 한 인물이 바로 바웬사. 영문 위키백과에는 발매년도가 1991년이라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발매되었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고, 메인 개발자 프셰미스와브 로키타를 인터뷰한 유로게이머 기사에 따르면 게임은 공식적으로 발매되지 못했으며 현재 인터넷에서 어밴던웨어로 돌아다니는 건 도중에 유출된 버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문판만 존재하는건지, 애초에 자국 내에 정식으로 유통할 계획이 있었는지도 이제 와서는 알 수 없고 게임 자체도 온전히 완성되어 발매만 기다리는 상태였는지 아직 개발중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ZOMO, Resources, Pressure, Balance 화면

솔리다르노시치는 객관적으로 좋은 게임이라 보긴 힘들고 숨겨진 명작이니 하는 식으로 추켜세울 생각도 없다. 게임을 시작하면 7개의 지역으로 나눠진 폴란드의 지도가 보여지고 화면 왼쪽에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화면 오른쪽에는 이런저런 메뉴 버튼들이 나열되어 있다. 각 버튼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Actions: 현재 그 지역에서 발생중인 솔리다르노시치 활동을 아이콘으로 표시.
  • ZOMO: 공산당 시기 존재했던 폴란드의 준군사조직. (진압군으로 생각하면 된다.)
  • Prisoners: 현재 그 주에 수용된 정치범들.
  • Real Wage: 해당 주의 소득수준.
  • Shortages: 해당 주의 물자부족 상태.
  • Resistance: 해당 주의 저항세력 강도.
  • Pressure: 해당 주의 공권력 강도.
  • Resources: 현재 가용자원. 행동 가능한 동지의 수, 지지자의 수 및 예산이 숫자로 표시된다.
  • Balance: 해당 주의 힘의 균형 상태.

여기서 첫 번째 문제는 Resources를 제외한 모든 맵모드에서 수치를 보여주지 않고 위와 같은 아이콘만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내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기 어렵다. 저항세력의 지지도가 올라가면 Balance 화면에서 독립조합 연대의 흰 깃발이 커지고, 여기에 대항해 AI도 거기에 공권력을 강화하거나 ZOMO를 해당 주로 이동시키는 반응을 보이며 게임의 목적은 공산정권의 이런 방해를 뚫고 전국적인 지지를 얻는 것. 즉 게임으로서는 Ndemic의 주식회사 시리즈같은 비대칭 전략 시뮬레이션이라 할 수 있다.

 

 

지역 화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개요, Action, Transfer, Activity 화면

각 주를 선택하면 지도에서 아이콘으로만 표시되던 것들이 숫자로 표시되는데, 다른 건 대강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밸런스는 어떻게 계산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위 스크린샷 좌상단의 포모제(Pomorze) 지역화면에선 주먹으로 표시된 공권력과 흰 V자로 표시된 저항세력 지지도가 30대 30으로 동등해야 할 것 같지만 밸런스는 압도적으로 정부가 높은 상태.

 

아무튼 여기서 행동을 정할 수 있다. Action 메뉴에서는 현재 보유한 예산과 인원 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 1회성 행동을 정할 수 있으며, 예를 들어 찌라시는 비용 3000 즈워티 및 5명을 딱 맞게 넣어야 Action Ready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다. 그렇지만 거기서 행동이 끝나는 게 아닌 게, Action Ready에 불이 들어온 상태에서 화면 상단의 +1을 클릭하면 그 위에 아이콘이 나타난다. 이를 이용해 앞으로 5턴분까지의 행동을 미리 예약하는 것이다.

 

Activity에서는 수 주간 이어서 진행되는 활동을 선택할 수 있으며 초반에는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직접 민중에게 자금지원을 하는 대민지원과 단식투쟁만을 선택할 수 있고 이후 장비를 구입하며 복사기로 선전물을 제작하거나 라디오 방송을 하는 등의 다른 행동들이 가능해진다. 이 동지들은 처음에는 신입(Novice) 상태지만 경험을 쌓게 되면 베테랑, 프로로 급이 올라가며 아마 행동의 효과가 올라가겠지. Action이나 Activity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정해야 하며, 임금상승, 자유로운 노조활동 허가, 정치범 석방, 소련군 철수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아마 각 지역의 경제적 및 의식 레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리라 생각된다.

 

Transfer 메뉴에서는 여분의 인원이나 장비, 자금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고 마지막 메뉴인 Buy에서는 복사기나 방송장비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장비류는 기본적으로 비싸지만 그만큼의 효과는 보여주며, 예산이 각 지역별로 나누어져 있으니 Transfer로 한 곳에 몰아넣은 뒤 구입하게 된다. 

 

 

 

그렇게 모든 지역의 행동을 결정했으면 턴을 넘겨야 할 것 같은데, 턴을 넘기는 기능이 없다. 행동을 결정하고 바로 실행되는 게 아니라 다음 턴 행동을 예약하는 것도 비직관적이었지만 이후 턴을 어떻게 넘겨야 하는지 몰라서 여기저기 클릭하고 들여다보다 보니 어느새 자동으로 화면 좌하단의 날짜가 넘어가 말없이 다음 턴이 실행되고 있었다. 시험삼아 게임을 그냥 켜놓기만 하고 방정리라도 하다가 돌아오니 마찬가지로 턴이 넘어가 있다. 즉 유저가 행동을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턴을 종료하는 게 아니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게임이 알아서 턴을 넘기는 것. 시간제한이 있는 턴제 게임은 종종 봤지만 이런 식으로 턴을 넘기는 게임은 처음이다. 세미리얼타임이라 하기에는 일시정지가 없고, 차라리 내부 처리는 주 단위로 하더라도 일 단위로 날짜가 넘어가는 걸 보여주었다면 혼란스럽진 않았을텐데.

 

아무튼 이 독특한 UI에 대충 적응해서 진행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벤트들이 발생한다. 초기에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던 남성이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보도하며 그는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수용되었다고 하거나 플레이어가 조직한 시위대를 폭도로 묘사하며 공산당 지도하에 경제사정이 언제나 좋아지고 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 뉴스가 나오다 저항세력의 규모가 커지면 이들도 어조가 조금씩 바뀌며 공산당이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긴급회의를 했다는 뉴스 같은 걸 보게 된다.

 

그 외에 어디서 동지가 체포되었다거나, 단식투쟁중이던 누가 사망했다거나 하는 메시지가 화면 하단의 검은 부분에 잠시 반짝였다 사라지는데, 이런 메시지들은 멋대로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7개의 지역 중 어디서 단식투쟁하다가 사망자가 나왔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소식들은 메시지창을 통해 표시하고 플레이어가 확인 버튼을 누를 수 있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작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UI면에서 많이 아쉬움이 느껴진다.

 

 

 

여기에 버그인지 한참을 진행하다 보니 다음 턴의 행동을 예약하려 해도 아이콘이 뜨지 않게 되었다. 예산은 예산대로 들어가고 잔여인원도 거기에 배정된 듯 줄어 있는데 단지 아이콘이 표시되지 않게 된 버그인지,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어 행동할 수 없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장비를 사용하는 것도 처음에 포모제에서 라디오 장비를 사용해 방송을 개시하고 효과가 좋은 것 같아 수도 바르샤바 일대에서 다시 돈을 모아 라디오 장비를 구입했지만 사용할 수 없었다. 어째서? 라디오는 한 번에 하나만 쓸 수 있나? 아니, 그러면 왜 여러개 구입할 수 있는 거지? TV 방송장비도 전국에서 돈을 끌어모아 장만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없었다. TV 장비를 구입했을 무렵에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아이콘 버그가 발생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단순히 표시가 안 된 건지 뭔가의 조건이 안 맞아 사용할 수 없었던 건지 알 수 없다.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진행하며 수만명의 지지자를 모으고, 그 지지자들의 기부금으로 예산도 생겨 대도시 중심으로 파업이나 데모를 실행하며 공산당을 압박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생한 크래쉬. 화면이 검게 변하며 아무런 조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프닝 화면에 보여지는 개발진들. 실사?!

만약 이 상태로 정식으로 발매된 게임이었다면 주저없이 쿠소게라 부르겠지만 위에 링크한 유로게이머 폴란드의 기사에 이 게임이 1991년에 "버려졌다(porzucona)"라고 언급되어 있기도 하니 아직 개발 도중의 빌드가 유출된 것일 뿐이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고, 제작자들이 어떤 의도로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이 게임을 만들었는지는 엿볼 수 있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럽다.

 

할 만한 게임이냐면 솔직히 좀 아니긴 해도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진기한 아티팩트를 보는 기분으로 접근하면 꽤 흥미있는 게임이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서 6월 항쟁을 배경으로 한 게임을 직선제 개헌 이후 딱 10년 뒤인 1997년에 제작하려 했다면 과연 반응이 어땠을까? 거기에 타이틀 화면에는 눈 멀쩡히 뜨고 살아있는 레흐 바웬사의 이미지와 함께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로고를 그대로 게임 로고로 쓰고 있는데, 이걸 국민운동본부 상징물과 김대중 얼굴로 바꾼다면?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이 아니라 어느 나라였어도 게임으로 만들기에는 당사자들이 아직 살아있는 '너무 가까운 과거'라 다루기 조심스러워질텐데, 그걸 위 화면에 보여지듯 실명과 얼굴 까고 만들었다는 건 어지간히 각오하고 만든 게임이 아니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솔리다르노시치는 사실 폴란드 내에서도 잊혀져 있는 게임이다. 게임이 영어로만 되어 있는 것도 이유겠고, 개발이 엎어져 홍보도 없었을 것이며, 게임도 미완의 상태니 어쩔 수 없겠지. 덕분에 정보도 거의 없고, 플레이 영상도 유투브에서 확인할 수 있던 건 어느 독일인이 30분정도 플레이하면서 이거 뭐하는 게임이지 헤메는 영상 정도밖에 없어 맨땅에 헤딩하며 대강의 기능을 파악한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아마 이 블로그의 게임들로 빙산 짤을 만든다면 최심부에 놓이겠지. 그래도 민주화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공산당 정권에 저항한다는 컨셉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끝내 마무리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Toponym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피니시드 스완  (0) 2024.04.13
안젤리크 스페셜 · 듀엣  (0) 2024.04.12
프로젝트 파이어스타트  (0) 2024.04.10
Katiusza #09 쇼핑몰내 빗자루 금지  (0) 2024.04.09
Katiusza #08 위치트랩  (0) 2024.04.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