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레미디 시리즈 (PC)
2015년작 월드 오브 허트와 2016년작 힙 오브 트러블의 두 작품으로 된 시리즈. 각각의 분량이 짧고 비슷한 만큼 묶어서 소개한다. 제작사 명의는 Ludosity로 팀 왈도의 한글화와 이런저런 네타거리로 유명해진 인디게임 이지(Iji)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2015년작은 무료로 배포하고 있으며, 2016년작은 유료. 이 글에 FPS 태그가 달려 있는 이유는 맨 아래 참조.
레트로 RPG스러운 오버월드에 탑다운뷰의 전방향 고정화면 탄막슈팅을 혼합한 방식의 독특한 게임. 형용사가 너무 많이 들어가긴 했는데, 일부 보스전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스크롤이 없고 고정화면 내에서 상하좌우 전방향으로 움직이며 진행되는 탄막슈팅 스테이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엄밀히 탄막슈팅과는 어긋나지만 아무튼. 그런 점에서는 언더테일과도 일견 유사하지만 미니게임 모음 중 탄막이 섞여 있는 언더테일과 달리 게임플레이가 탄막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공격이 가능한 등 방향성이 많이 다르다.
그래픽적으로는 단색에서 많아야 2색 정도를 사용한 스프라이트, 그리고 한 스프라이트의 같은 스캔라인에 색 2가지가 겹치지 않게 만드는 등의 모습을 보면 8비트 홈 PC를 떠올리게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면 아래 아타리 2600용 동키콩의 마리오와 폴린 스프라이트를 보자.
일부 리뷰어들은 픽셀아트와 레트로 스타일을 구분하지 않고 도트그래픽에 해상도가 낮다 싶으면 패미컴을 들먹이기도 하지만 패미컴은 이 제한이 상대적으로 약해 8x8 내에 투명을 포함한 4색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 레미디에서 대형 스프라이트가 여러 색으로 되어 있다면 8x8이나 16x16의 사각형을 경계로 색이 바뀌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이 역시 다색을 흉내내기 위해 복수의 다른 컬러 팔레트를 동원했던 8비트 PC들을 모사한 부분.
본론으로 돌아가자. 월드 오브 허트는 당시 에볼라 구제기금 모금을 위해 개최된 게임 잼, 즉 제한 시간내에 정해진 주제로 처음부터 하나의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내는 행사 참가작으로 당시 개발과정을 라이브로 중계하며 4일만에 완성된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주제는 역시 치유 아니었을까. 일단 1편 월드 오브 허트의 소개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병든 세계의 레미디 공주>는 토성의 치유학교를 이제 갓 졸업한 레미디는 허트랜드로 내려가 길 잃은 오리부터 마왕까지 아파하는 모두를 치료하고, 끝에는 괴로워하는 힝스트 왕자를 치유하는 짧고, 기발하며 마음 따듯한 모험 이야기입니다.이 게임은 Ludosity의 Games Against Ebola 자선 켐페인 게임 잼 참가작으로, 개발과정을 라이브로 중계하며 4일만에 만들어졌습니다. 안톤이 그래픽을, 마티아스와 스테판이 음악을 담당했고 나머지는 제가 맡았습니다. 이 버전은 켐페인이 끝난 이후에 옵션 메뉴, 복수의 세이브 파일, 난이도 추가 및 게임패드 지원을 추가한 버전입니다.
게임플레이는 RPG같은 방식으로 월드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증상으로 앓고 있는 NPC들과 대화하면서 진행된다. 그 아파하는 이유 중에는 어깨가 빠졌다거나 하는 정상적인 이유들도 있지만 대체로 유머러스한 것들이 대부분. 치료에 들어가면 탑다운뷰 슈팅으로 변하고, 상대를 아프게 하는 요인들을 전부 제거하면 치료가 종료되며 해당 NPC의 스프라이트와 대사가 변한다. 죽어가는 모습이던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치료하며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필드를 돌아다니며 간간히 보이는 상자들을 열면 파워업을 얻을 수 있고, 캐릭터들을 치유하거나 상자를 여는 것으로 하트를 모을 수 있는데 이 하트를 일정 이상 모아야 다음 에리어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하트나 파워업을 많이 모으면 그만큼 더 게임이 쉬워지긴 하겠만 100% 클리어를 목표로 할 필요까지는 없으며, 일부는 알기 힘든 곳에 숨겨져 있기도 하니 게임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싶을 때 놓친 게 있나 찾아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월드가 그리 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워프존이 설치되어 있어 하트가 모자라 특정 지역을 다시 한 번 조사하고자 하거나 할 때 먼 길을 다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가 되어 있는 것도 장점.
조작은 방향키 + 액션키만으로 이루어지는데, 키보드로 플레이할 경우 방향키 외에 WASD를 사용할 수도 있고, 그 외의 모든 조작을 담당하는 액션키는 X, Z, Y, 시프트, 컨트롤, 엔터 등 다양한 키에 매핑되어 있다. Y에도 대응하는 건 좋은 센스인데, 독일어 표준 자판은 Z와 Y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 때문에 독일어 윈도우즈 사용중에는 가끔 이걸 수동으로 설정해서 뒤집어 줘야 할 필요가 있던 걸 생각하면 센스있는 배려이다.
대부분의 일반 NPC를 치료하면 하트가 올라가고, 올라갈수록 전투중("힐링 모드") 체력이 상승한다. 파워는 샷의 위력, 멀티는 n웨이의 개수이며 리젠은 회복력. 치료중 맞고 버티지 않으면 HP가 자동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플라스크는 수류탄처럼 던져 사용할 수 있지만 전투 1회당 회수 제한이 있으며 (위 스크린샷은 최후반으로 총 8개) 전투가 끝나면 전부 회복된다. 치료에 실패할 경우 패널티 없이 그 자리에서 재도전할 수 있으며 세이브 기능을 지원한다. 전투는 간단한 것들도 있지만 까다로운 것들도 섞여 있는데, 몇 번 죽더라도 요령을 파악해 재도전하면 결국 가능하다. 플레이 시간은 1~2시간 남짓.
난이도는 노멀, 하드, 마스터의 3가지로 나뉘는데, 노멀은 그리 어렵다고 하기 힘들지만 하드나 마스터쯤 가면 제법 하드코어한 탄막계 게임이 된다. 진행할 수록 적들의 패턴이 다양해지는데, 레미디는 원거리 공격형인 만큼 레미디를 향해 몸통박치기를 노리며 접근해 들어오는 적들을 어떻게 빨리 초반에 정리하는가가 관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에는 온갖 병이란 병은 다 앓고 있는 힝스트 왕자와 싸우게 되고, 이기고 나면 레미디가 허트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며 허트랜드의 이름이 힐랜드로 바뀌게 된다.
이후 그동안 지나온 맵들을 돌아다니며 도중에 만난 누구와도 상관 없이 골라서 결혼할 수 있는데, 이 캐릭터들마다 전부 대사가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이걸 멀티엔딩이라고 한다면 최소 30종 이상의 멀티엔딩이 존재하는 셈. 위 스크린샷에는 'Some Girl'을 선택한 화면인데- 얘 대사들은 다음과 같다.
치료전: 난 친구가 없어.
치료후: 와아! 당신이 내 친구네!
결혼후: 이제 친구가 많아졌어요! 레미디 여왕님 사랑해요!
백합이라고? ...응 그렇긴 한데, 이 게임은 백합 정도가 아니라 오리, 식물, 미라 따위도 치료 가능한 캐릭터다. 사랑엔 국경도 성별도 종이나 생사의 구별도 없는 거니까 괜찮아.
2편인 힙 오브 트러블은 스토리상 프리퀄로, 토성의 공주 레미디가 아직 치유학교를 다니는 와중에 '보스 타워'라는 불길한 탑이 솟아나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나선다는 이야기.
기본적인 시스템은 전작과 비슷하나 일단 데미지를 받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체력이 차던 전작의 리젠이 드레인으로 바뀌어 적에게 데미지를 주는 만큼 체력이 회복되게 변경되었으며, 덕분에 전투중에 아차해 데미지를 많이 입더라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 추가로 전작의 플라스크가 수류탄 형식이었던 데 비해 동행하는 NPC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게 되었으며, 스피드업이나 호밍샷, 전투중 레미디 주변에 데미지를 입히는 블라스트, 일시적으로 레미디의 n-way를 일점집중시켜 데미지를 늘리는 포커스, 전투중 체력을 회복시키는 힐 등 여러가지로 준비되어 있다. 치료된 NPC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상대를 데이트에 초대할 것인지를 묻는데, 이를 통해 다양한 능력을 확인해볼 수 있다. 결국 이것저것 해 보다가 자기 취향에 맞는 걸 하나 선택해 끝까지 가게 되기 쉽겠지만 전투의 다양성을 늘려주려는 시도가 아닐까.
전작에 이어 추가된 작은 QoL로, 해당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얻으면 맵에 들어갈 때 위 스크린샷처럼 녹색 체크마크가 보여진다. 놓친 요소를 찾아다닐 때 유용한 기능.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고 각 구역의 오버월드에만 표시된다.
외형상으로는 전작이나 후속작이나 똑같은 게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플레이 중에 보면 보스의 종류가 늘어나고 적탄들이 보여주는 기믹이 늘어나 게임으로서 충실한 발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분량은 마찬가지로 1~2시간 정도. 마지막 보스를 쓰러트리고 나면 축하를 위해 무도회가 열리게 되면서 그 때의 데이트 상대와 춤을 추게 되는데... 응? DDR? 난이도는 노멀, 하드, 데스의 세 가지에 하술할 숨겨진 모드가 존재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로 끝났으면 자기복제 게임의 마이너 업그레이드에서 끝났을 수도 있지만, 새 게임을 시작하며 난이도 선택창에서 오른쪽 화살표를 5초 이상 누르고 있으면 마지막의 데스 난이도가 REALLYDAD 으로 바뀌며 숨겨진 모드가 해금되는데, 단순히 난이도를 높힌 게 아니라 게임을 3D FPS화한 아예 새로운 게임이다. 비트맵 스프라이트로 맵을 만들어 놓고 코드 레벨에서 레이캐스팅으로 벽과 몬스터를 구현하며 그 스프라이트를 텍스쳐로 사용한 것 같은데, 화면 하단에 레미디의 얼굴이 나오고 피탄할 때마다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은 울펜슈타인이나 둠을 의식한 듯? 이 모드에서는 세이브를 할 수 없고, 하트는 피탄 가능한 회수, 플라스크는 수류탄, 십자는 회복력, 별은 샷의 위력 강화 정도이다.
샷은 일반 모드와 마찬가지로 일정 간격으로 자동으로 발사하며, 스트레이핑이 불가능해 까다롭게 느낄 수 있다. 적들의 샷의 속도가 느린 편이다 보니 발사된 걸 보고 피하는 것도 가능하나, 시야가 좁기도 하고 빠른 시점전환이 힘든 만큼 열린 공간에서 싸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를 탄에 맞아 체력이 뚝뚝 끊기는 걸 보게 된다. 조작키 수를 늘리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울펜슈타인보다 한 세대 앞의 80년대 후반 FPS를 의식한 디자인이라 생각하면 앞뒤가 대강 맞는다. 일례로 1987년작 아타리 8비트 시리즈 홈 컴퓨터로 발매된 미디 메이즈가 딱 이런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느린 템포에 엄폐를 이용해 적탄을 피해가면서 하나씩 천천히 제거해 나가는 플레이 템포가 유사하다.
전체적인 플레이 분량은 본편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더 긴 정도. 스테이지 수는 적지만 한 전투가 곧 사각형의 3D 공간에서 엄폐물을 이용해가며 적들을 사냥해야 하는 게임성으로 바뀐 만큼 한 스테이지마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다만 게임플레이 방식이 너무 옛날식이라 현대 FPS에만 익숙한 유저라면 그냥 말도 안 되는 최악의 FPS라 오해받을 수도 있겠고, 덕분인지 유투브를 봐도 이 FPS 모드에 대한 실황이나 플레이 영상이 드물다. 내가 보기엔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아까운데 말이지.
처음 시작하는 건물 내의 NPC들을 우선 치료하고 밖으로 나가 파워업 상태를 올리다가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면 이 모드 전용 보스를 상대하게 되는데, 벽에 붙어 있는 해골 두 개로 된 2체 보스로 되어 있다. 이 보스전은 엄폐물이 없는 뻥 뚫린 공간이며, 죽일 수도 없는 촉수들이 계속해서 레미디를 추적해 오며 근접 데미지를 입히기 때문에 다른 전투들보다도 훨씬 난이도가 높은데 일단 내가 공략했을 때는 좌측에 있는 해골에게 플라스크 수류탄을 전부 던지고 빠르게 처치한 뒤 화면 왼쪽 절반을 벗어나지 않으며 대각선으로 우측의 해골을 공격했다. 촉수는 가까이 다가가야 반응하기 때문에 맵 왼쪽 절반만 차지한 상태에서 싸우면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촉수들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으며, 촉수 넷을 피하는 것 보다는 둘만 피하는 게 낫다. 여기까지 클리어하고 나면 전용 엔딩샷이 보여진다.
레미디 시리즈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는 역시 그 레트로 아트스타일에 기인한다. 위에서 스캔라인이니 미디 메이즈니 하는 이야기를 한 건 이 게임이 단순히 예산 절약을 위해 픽셀아트 게임을 만들고 그걸 '레트로 스타일'이라 우기는 게 아니라 당시 하드웨어적인 제약에 의해 생겨난 연출까지 포함해 재현한 정성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 이건 혼모노다.
사실 RPG로서 따지면 단선적인 진행에, 스토리라기보다는 다음 스테이지를 언락하며 마을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하는 거랑 똑같지만 그걸 전투가 아니라 치료라고 부르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던 NPC들이 건강을 되찾고 주인공에게 감사하는 메시지를 보면 다음 상대를 찾아서 치료하고자 하는 의욕이 그만큼 들게 된다. 거기에 이 치료모드가 턴베이스 메뉴 시스템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잘 만들어진 슈팅이라는 점도 큰 플러스. 인물들의 대사도 유머러스하고,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를 진행하기 위해 귀찮은 전투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다음 전투를 플레이어가 직접 찾아나서게 만들며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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