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테일 (2015 PC)
어느날 갑툭튀해 화제를 쓸어버린, 여러 의미에서 전설적인 인디게임. 팬덤이 매우 활발했던 작품이기도 한데, 나는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주변의 덕후들이 극성 신자로 돌변해 이들의 강권에 결국 등떠밀리듯 플레이하게 되었다. 언더테일은 사전정보 없이 있는 그대로 플레이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하는데, 뭐 절반 정도는 동의하지만 최소한의 플레이 효율을 생각한다면 아래의 루트정보 정도는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 노멀엔딩: 아무 생각 없이 진행하거나 배드엔드 루트를 1회차에 진행한다.
- 배드엔딩: 전투중 공격 커맨드를 일체 실행하지 않고 Lv. 1 / EXP 0 상태로 마지막까지 진행한다. 2회차 이후 가능.
- 굿엔딩: 새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몬스터를 죽이며 진행하고, 모든 보스전에서 상대를 죽인다.
- 진엔딩: 굿엔딩을 1회 이상 본 다음 배드엔딩 루트를 진행한다.
일반적으로는 각각 '노멀 엔드', '불살 엔드', 몰살 엔드', '페이크 불살 엔드'로 불리는 것 같은데, 이 시점에서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에 대한 내 태도가 어떤 상태인지, 이미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라면 알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언더테일 신자이고 비판적인 의견을 듣고 싶지 않다면 열독을 중단하시길 권한다. 이하 네타바레가 이어지기 때문에 적당한 스크린샷 덩어리로 가린다.
언더테일은 분명 모두를 위한 게임이 아니다. 당신이 언더테일을 좋아했다면, 그리고 특히 불살 루트를 플레이하며 감동을 받았다면, 당신은 아직 동화를 마음 속에 간직한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오즈의 마법사나 디즈니, 지브리 같은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좋아할 것이며 이 게임 내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귀엽고 매력적이거나, 바보스러울지언정 사랑스러운 바보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에 비해 난 이 게임을 하다가, 컨트롤러를 몇 번이나 벽에 내던졌다. 이만큼이나 짜증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게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려워서 집어던진 게 아냐. 난 최초 플레이에서 토리엘을 죽였다. 왜냐고?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실수로 죽였을까? 사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게임에 대한 예상을 계속 뒤엎는 메타적인 마인드 트릭을 사용하고, 초견 1회차때 어느 순간 300이상의 데미지가 갑자기 들어가며 토리엘을 '실수'로 죽인 뒤 망연자실해진 플레이어들도 제법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난 이 아동 유괴범이 처음부터 수상쩍었고, 대사를 할 때마다 들리는 사운드 이펙트도 거슬렸으며, 무엇보다 대사 하나하나에서 닭살과 소름이 돋아 견딜 수 없었다. 즉 전투가 시작되고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시점에서 토리엘은 내겐 지긋지긋한 몹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중에 내게 언더테일을 기어이 포교하고 만 신자와 이야기를 하면서, 위의 엔딩 조건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즉 제노사이드 루트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필드에 등장하는 랜덤 인카운터까지 전부 전멸시켜야 하는 것, 그리고 한 번이라도 제노사이드 엔딩을 보고 난 뒤에는 트루 패시피스트 엔딩을 볼 수 없다는 것까지. 적어도 이 시점까지의 언더테일의 게임플레이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고, 그렇다면 노멀 → 패시피스트 → 제노사이드 순서대로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게임을 리셋했다. 나는 참고 참으며 토리엘을 살렸고, 이 세이브 기록을 읽은 플라위가 나를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며 썩소를 지었다. 참고로 내가 이 게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바로 이놈이었다. 배드엔딩에서 망가진 게 아쉽지만.
그리고 이 때부터 패시피스트 루트를 향한 고행이 시작되었다.
패시피스트 루트에 들어간 언더테일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 캐릭터들을 진심으로 아껴주길 요구한다. 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이들을 위해줄 수 없다. 이런저런 연출로 플레이어에게 어떤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시도하는 거야 제작자의 마음이지만, 이렇게 감정을 강요받고 싶지 않다. 특히 내 인내심을 한계에 달하게 만든 건 파피루스. 난 파피루스가 진심으로 싫다. 누군가에게 파피루스는 진심으로 주인공을 위해주는 마음약하고 사랑스런 바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파피루스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특히 노멀-패시피스트 루트에서 전투가 발생했을 때 파피루스를 살리기 위한 커맨드가 "아첨(Flirt)"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패드를 내던지고 게임을 꺼버렸다. 저 새끼한테 아첨을 하라고? 다음날 이를 악물고 진행하다가, 파피루스와 데이트를 해야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또다시 패드를 내던졌지만 이번엔 심호홉을 들이쉬고 게임을 재개했다. 아니, 정말로. 누구나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유형의 캐릭터라는 게 있지 않아?
토리엘과 파피루스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들었을 뿐. 아피스, 몬스터 꼬마, (마스크를 벗은 후의) 언다인 등 대부분의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또 너냐"는 감정밖에 들지 않는다. 물론 내가 글러먹은 인간인 건 인정한다. 이건 딱히 인물들의 문제 이전에 게임의 배경과 및 적에 대한 동정을 강요하는 스토리텔링에 기인한다.
프롤로그에서 인간과 몬스터들은 과거 전쟁을 했으며, 그 결과 패배한 몬스터들이 지하세계로 도망쳤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지상으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우연히 지하로 떨어지는 인간들을 잡아 그 영혼을 이용해 봉인을 풀고 지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여기에 주인공이 몬스터라면 모를까, 주인공은 '인간'이다. 그러면 '인간'이 해야 마땅한 건 몬스터들과 친구가 되는 게 아니라 몬스터들을 퇴치하는 것 아닐까?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언급된 내용이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경쟁종과 생활권을 공유하는 생물이 아니다. 불살 엔딩에서 인간사회에 대한 지식이 없는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장면이 내게는 문자 그대로 인간도 아닌 것이 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처럼 보인다.
노멀, 불살루트의 보스전 처리방식에도 불만이 남는다. 노멀 루트에서 실질적 최종보스를 넘기고 페이크 최종보스인 플라위를 상대할 때, 처음에는 깜놀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안다면 패시피스트 루트에서 이미 아스리엘도 연출만 저렇지 결국 메타적으로 발로 플레이해도 결국 이긴다고 예상할 수 있지 않나. 이건 보스전이 아니라 그냥 버튼을 입력하는 게 좀 귀찮은 컷씬에 불과하다. 물론 처음 한 번은 독특한 연출로 다가오지만, 연달아 두 번을 보면 그 효과가 반감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이런 일회용 연출은 패시피스트 엔딩을 위해 남겨두고, 노멀 엔딩은 평범한 보스전으로 만드는 쪽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패시피스트 엔딩을 본 직후 바로 재시작, 기다렸다는 듯이 학살을 시작하며 그동안 쌓인 언더테일에 대한 모든 불만이 해소되는 해방감을 느꼈다. 결정적인 건 그동안 무저항으로 쳐맞기만 하면서 온갖 방식으로 비위를 맞춰야 했던 기존 루트가, 무슨 시바리 플레이라도 강제로 걸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몬스터들이 선하다고 아무리 어필을 해도, 계속 맞으면서 그게 직감이 되겠나? 그렇게 그동안 불합리하게 느껴졌던 걸 이제 양손 풀고 복수에 들어가다 보면 랜덤 인카운터로 나오는 적들 하나하나를 죽이는 과정이 즐겁다.
게임이 제노사이드 루트에서는 에리어별로 반드시 일정수의 몬스터를 학살하지 않으면 다음 진행이 되지 않고, 그 노르마를 채우면 해당 지역의 몬스터가 전멸한 것으로 판정되어 인카운터가 발생해도 적이 없고, 그 에리어의 NPC들이 사라지게 되며, 아쉽게도 보스들 중 언다인과 샌즈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일격에 제거된다. 어째서? 상대는 살의가 없기 때문이라고는 하는데 유저에게 자신의 행동을 되묻고 후회하게 만들려는 싸구려 트릭 일 지도 모르고, 그냥 보스전을 제대로 만들기 귀찮았을 지도 모른다.
다른 루트에선 최후의 알현실까지 가는 길에 그동안 등장했던 몬스터들이 언더테일 세계관의 과거 이야기를 해 주지만, 제노사이드 루트에서는 플라위가 혼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변경된다. 이 부분을 확인하며 든 생각. 플라위는 플레이어의 상징이다. 그는 플레이어와 같은 세이브/로드의 능력을 갖고 있었고, 결국 모든 대사와 모든 반응을 이끌어내고 이 세계관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게 되어 하나둘씩 죽여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플라위의 동기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내용이다.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만랩에 더 이상 컨텐츠가 고갈된 세계에 당신이 덜컥 갇힌데다 "친구들"도 결국은 NPC, 한정된 대사와 반응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패시피스트 엔딩을 보고 난 뒤 "단지 그 루트가 있기에" 흥미로 제노사이드 루트를 시작한 플레이어에 대한 정신공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노사이드 루트를 괴로워하면서, 혹은 싫어하면서도 그게 언더테일이란 게임의 다른 절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플레이한 것 같다. 도중에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껴 그만두었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는지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최소한 검색해 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죽이고 싶었지만 그 뒤의 이벤트를 보기 위해 억지로 살린 나와는 정반대 루트인 셈인데, 글쎄. 플레이 순서는 같았더라도 동기가 정반대였던 나로서는...역시 언더테일의 최애캐가 플라위가 될 수 밖에 없다. 플라위를 아무리 싫어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패시피스트 엔딩을 선호한다 하더라도, 제노사이드를 보기 위해 게임을 리셋했다면 당신도 나도 플라위와 다를 게 없다. 플라위는 게임의 세계를 대하는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의 거울이다.
스토리텔링의 문제는 여기가지로만 하고, 게임플레이의 창의성적인 면에서 보면 만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게임. 여러 가지 의미에서 RPG, 때로는 비디오 게임의 상식에 도전하는 게임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언더테일의 요소들 중 정말로 새로운 건 별로 없고, 어디까지나 이런저런 다른 게임들에서 사용된 요소들을 적절히 짜맞춘 게임이다. 특히 마더와 동방프로젝트, 스탠리 패러블 등이 먼저 떠오른다. 세이브/로드라는, 게임 메카닉을 게임 내 세계관의 능력으로 해석하고 적극적으로 플롯에 도입한 건 언더테일이 확실히 처음인 것 같지만, 그 외의 요소들 대부분은 아, 이건 어디서 가져왔군 하고 대강 알 수 있는 정도.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요소가 얼마나 유니크한가가 아니라, 여기저기서 따온 요소들을 어떻게 유니크하게 조합하냐라고 하면 언더테일은 확실히 독창적이지만 내게는 딱 거기까지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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