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 인 더 카, 루저! (2021)
크리스틴 러브의 러브 컨쿼즈 올 게임즈에서 제작한 레즈비언 로드트립 RPG. 기존작들과 달리 비주얼 노벨이 아니라 RPG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러브가 만든 게임들답게 평범한 RPG 공식을 따르지 않는 독특한 시스템이 눈을 끈다.
주인공은 샘 애논, 도발적인 복장과 달리 소심한 성격의 트랜스레즈비언이다. 여름방학 중의 어느날, 친구인 그레이스와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타난 그레이스는 약 1000년 전에 전설의 용사가 데빌 머신이라는 악마를 봉인했다고 하는 '운명의 검'을 박물관 유리 깨고 훔쳐 탈주하는 중이었고, 어어 하는 사이 그레이스의 애인인 발렌틴과 함께 데빌 머신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2000km의 로드트립을 떠난다는 골때리는 도입부로 시작한다. 세상에 박물관에서 전설의 검을 훔쳐 모험에 떠나는 용사라니.
그레이스는 범성애자로 보이며 그 애인인 발렌틴은 지정성별 여성의 논바이너리, 스스로 대명사를 "they"로 불러달라 한다. 간단히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샘은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여성으로 인식하는 트랜스여성이며, 발렌틴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정의하지 않는 것. 사실 엄연히 이 게임에서 '용사' 포지션인 그레이스보다 이 둘이 더 스토리상 비중이 높은데, 가끔 게임이 좀 과하게 설교조가 되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LGBT+에 속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내면의 고민들이 잘 묘사되어 있어 본인이 시스젠더 이성애자라도 이 인간들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관심이 있다면 플레이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끔 징징대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내용 자체는 현실적이다.
세계관은 마더 이래로 때때로 보이는 현실세계를 기반으로 하면서 다소간의 판타지 및 SF적인 설정을 섞은 모습.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모던펑크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쓰이는 말은 아니다) 설정상 이 세계에는 천사가 존재하고 디바인 오더라는 종교단체 비슷한 것이 정부의 역할을 겸하고 있으며, 데빌 머신은 1000년에 한 번 눈을 뜨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봉인해야 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레이스는 데빌 머신의 부활이 가까워지며 그 추종자들이 벌써부터 난동을 부리고 기계 몬스터들이 출몰하고 있는데 디바인 오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 전설의 검을 훔쳐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다고 한다.
덕분에 앞으로는 몬스터들, 뒤로는 교단과 천사들에게 쫓겨다니는 처지가 되지만 애인인 발렌틴은 물론 샘도 별다른 항의 없이 그레이스의 무모한 계획에 올라타게 되며 이후 기계 몬스터에게 붙잡혀 있던 안젤라라는 천사를 구출, 4번째 동료가 된다. 안젤라가 동료가 되면서 왜 디바인 오더의 천사들이 데빌 머신과 그 추종자들을 방치하고 있는지 설명이 나올 거라 기대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인간들에게 모든 걸 맡긴다는 것 같지만 그러면서 인간들에게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할 거 다 하는, 작중의 경찰같은 포지션이기도 하니 개입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전투 시스템이 독특한데, 일단 레벨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공격/도구/마법 등의 메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 캐릭터는 총 3개까지의 장신구(trinket)를 장비할 수 있고 어떤 장비를 누가 장비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행동이 가능해진다. 각 캐릭터 및 장비별로 쿨다운 타이머가 존재하며, ABXY 버튼으로 해당 캐릭터의 능력을 발동시키게 된다. 비주얼은 사이드뷰의 파이널 판타지 느낌이지만 음악은 경쾌한 보컬곡이 중심이라 페르소나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일부 비슷한 느낌의 곡도 있지만 곡조가 살짝 다르다.
적이 2체 이상 있을 때는 LB를 통해 어떤 적을 우선적으로 타게팅할지를 선택하게 되며 모든 파티가 동일한 타겟을 공격한다. 능력을 전부 사용하고 쿨다운을 기다릴 수도 있지만 RB를 누르면 다른 장신구의 능력으로 사이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공격을 연속적으로 이어나가면서 콤보를 쌓아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레이스는 4번째 장비로 훔쳐온 '운명의 검'을 고정해서 갖고 있으며 이를 발동시키면 컷신과 함께 타게팅된 적의 스태거(stagger) 미터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스태거(흔들림, 비틀댐)는 일종의 약화상태로, 일반 공격들 중에서도 적의 스태거 퍼센트를 높일 수 있지만 보통은 그레이스의 운명의 검 공격으로 빠르게 높일 수 있다. 스태거 퍼센트가 일정 이상이 된 적은 약화상태가 되어 더 많은 데미지를 입게 된다. 말로만 설명하면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튜토리얼도 잘 갖춰져 있고 금방 익숙해지고 나면 타이머를 조절하며 리듬감 있는 전투를 즐길 수 있다.
다른 특징으로 주인공인 샘은 장비한 장신구에 따라 전투중에 아군을 회복시킬 수 있는데, 전투중의 회복은 일시적이며 전투가 끝난 뒤에는 회복 포인트를 찾아가든 아이템을 사용하든 해서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게임 시작시 난이도 설정에 따라 전투 종료후 완전회복으로 만들 수도 있다.
목적지는 2000km 떨어진 데빌 머신이 봉인된 레서 아나스타시아라는 곳. 화면 오른쪽 위에 km 표시가 있어 대강 얼마쯤 왔는지 알 수 있고, 처음에는 2000km라고 하지만 실제론 2400+ 정도 가야 한다. 발렌틴의 오픈탑 차를 타고 자동으로 이동하게 되며 플레이어가 직접 월드를 탐색하는 요소는 없으며 중간중간 인카운터에서 얻는 돈으로 휴계소에 들러 기름을 넣거나 장비를 변경하거나 하는 정도로, 위 화면 오른쪽의 3개의 패널이 각 차선을 나타낸다.
로드트립 중에는 LB/RB로 차선을 변경하며 적들과 인카운터하거나 이를 피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며, 사당(Shrine)은 회복 포인트이다. 전방에 있는 적들의 랭크와 얻을 수 있는 돈의 양을 미리 알 수 있으며, 때로 의도적으로 현재 진행 단계에서 이길 수 없는 강력한 고레벨 적들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인카운터를 선택하고 어떤 것을 회피할 지가 중요하다.
상기한대로 캐릭터는 경험치를 통해 성장하지 않지만 주유소에서 구입 가능한 장신구들을 통해 강화시킬 수 있다. 처음에는 1레벨 장비만을 구입할 수 있지만 강화 시스템이 있어 여분의 장비들을 합성해 1+로 강화시키면 실질적으로 2레벨 장비인 것으로 취급되며, 각 캐릭터가 장비한 세 장비가 모두 1+가 되면 2레벨 캐릭터로 간주된다. 이렇게 전원에게 1+ 장비를 맞춰 2레벨 파티로 간주되면 이후 2레벨 장비를 직접 구입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다시 이것들을 2+로 만들어 3레벨 장비를 구입하게 하는 식의 반복. 이 레벨은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장비는 원하는대로 골라서 구입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10개씩 패키지 형식으로 구입하게 되며, 1레벨 세트를 구입하면 1레벨 아이템 9개와 1+레벨 1개가 고정으로 입수된다. 이 장비들 중에는 회복용 아이템도 섞여 있으며, 원한다면 회복용 아이템들만 들어있는 세트를 구입하는 것도 가능. 레벨이 높은 장비일수록 더 많은 양의 아이템과 장비를 합성재료로 사용하게 되며, 소재의 레벨은 중요하지 않고 개수만이 중요. 원하지 않는 장비는 나중에라도 합성소재로 사용하면 된다.
이전 에리어로 돌아가 노가다를 하는 게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에 전투를 너무 많이 회피하다 보면 당연히 난이도가 올라가게 되며, 진행하다 보면 제법 난이도가 올라가는데 레벨 개념이 없고, 임의로 노가다도 할 수 없어 있는 것으로 싸워야 하는 시스템상 상당히 벅찰 수 있다. 보통 자기보다 1레벨 정도 높은 적들 정도는 크게 무리하지 않고 제거할 수 있으며 레벨이 같거나 낮은 적들은 적극적으로 노리는 정도면 무방. 그 외 2장 이후 일부 사이드퀘스트의 보수로 장비를 얻을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노리는 것도.
상기한 바와 같이 각 캐릭터는 3개까지의 장신구를 장비할 수 있으며, 장비된 순서대로 해당 장비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샘에게 회복을 장비시켰을 경우 그 턴에서는 통상공격을 할 수 없고 회복을 하거나 그냥 턴을 넘기는 것 밖에 할 수 없으며, 각 캐릭터마다 사이클이 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RB를 누르면 동시에 다음 장비세트로 넘어가진다. 말로 설명하면 살짝 복잡해지지만 튜토리얼이 있어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으며, 어떤 장비를 어느 순서로 장비시키는가를 고민하는 과정은 카드게임의 덱 빌딩같은 느낌을 준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디자인이다.
그 전까지 적당히 타이밍 보며 버튼을 누르는 정도로 충분했다 싶더라도 쉽게 막힐 수 있는 구간이 3장의 보스 데드네임. 데드네임은 전투 초반에는 능동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반격만 하기 때문에 HP에 주의해 가며 진행하면 크게 어렵지 않지만 체력 30%정도를 남기게 되면 샘의 남은 HP를 1%로 만들고 나머지 파티는 전부 전멸시킨다. 이 시점이 되면 최대한 빨리 우선적으로 샘을 회복시키고, 회복마법의 쿨타임이 돌아오는 대로 멤버들을 하나씩 부활시켜 바로 힐을 해 파티를 부활시키지 않으면 힘들다. 30% 아래 구간에서는 데드네임도 공격을 해 오지만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반격이 더 무서운 보스이니 적당히 주의해 가며 싸우는 게 필요.
그 이전까지 최대한 DPS를 높이기 위해 쿨타임 되자마자 버튼을 누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면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쉬운 보스. 6, 7번은 실패했다가 패턴을 깨달았는데, 잘 만든 턴제 RPG들이 적의 행동과 특징을 파악해 거기에 알맞는 대응을 찾아내는, 본질적으로 퍼즐게임이란 걸 생각하면 재미있는 발상이다. 여기에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 보스의 스토리상 역할에 어울리는 것이, '데드네임'은 개명하기 전의 옛 이름을 가리키는 영미권 트랜스젠더들의 용어이다. 3장의 대부분은 자신감을 잃은 샘의 독백과 자문자답으로 이루어져 있고 끝내 자신의 컴플렉스와 열등감을 집약한 존재가 데드네임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페르소나 식으로 말하면 섀도우. 샘의 거울인 만큼 대부분의 행동이 반격으로 되어 있는 것도 스토리 컨셉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스팀 리뷰에는 후반의 전투가 지루하다는 평이 곳곳에 보이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각 상황에서 어떤 장비를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가에 따라 전투가 비교적 단시간에 정리될 수도 있고 정말 한없이 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위의 두 녀석들. 본작에는 전체공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에 하나만을 쓰러트릴 수 있는데, 이 놈들은 하나를 쓰러트려 잡으면 다른 하나가 같은 적을 몇 번이고 다시 소환해 전투가 끝나지 않게 만든다. 다행히도 회복은 하지 않으니 하나를 딸피 상태까지 만들어 놓고 다른 쪽을 패다 스태거 상태가 되어 행동을 못할 때 이것이 풀리기 전에 둘 다 마무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아니다 싶으면 일단 전투에서 도망치고 작전을 바꿔 시도하며 해답을 찾게 되는데, 마지막 장인 4장쯤 오면 오히려 필드에서 등장하는 적들이 최종보스보다(!) 패턴이 까다로운 경우도 많다. 4장의 서브퀘스트를 수행하면 9레벨 장비 교환권을 보상으로 주기 때문에 이걸 다시 강화시켜 10레벨급 장비를 만들 수 있지만 일단 8단계 장비를 강화한 9레벨급으로 만드는 정도로도 최종보스전에서 무리 없이 싸울 수 있기 때문에 서브퀘스트 적들이 너무 힘들다 싶으면 그 정도 선에서 타협해도 무방하다.
로드트립을 컨셉으로 한 건 용사물에 대한 클리셰 비틀기의 일부가 아닐까. 세계의 위기 앞에서 무슨 세계여행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오만 곳을 돌아다니며 서브퀘스트나 게임에 따라서는 미니게임을 즐기며 한가로이 보내는 용사들도 많은 걸 생각하면 차에 올라타 목적지까지 직선으로 달려가는 그레이스 일행의 모습은 신선하긴 하지만 도중에 휴계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장비 가챠를 돌리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게임이 도로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북미의 장거리 고속도로 로드트립이 실제로 대충 이런 느낌이긴 하니 그럴만도 하긴 하지. 거기다 도망자 신분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디자인의 좋은 게임이지만 이걸 만들던 시기에 크리스틴 러브에게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던건지 게임 곳곳에서 설교조가 되는 건 역시 마이너스다. 데블 머신의 추종자들로 대사를 갖고 등장하는 적들은 하나같이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의 스테레오타입을 보이며 거기에 대한 주인공 파티의 행동은 결국 무력진압. 뭐, 게임 내적으로 보면 트랜스포비아 이전에 다른 악행들도 많이 저지르고 있고 마왕의 추종자같은 존재들이니 대화로 해결할 수 없기도 하겠지만 성소수자들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을 단순히 악역으로 분류해 나눈 건 좀 유치하잖아. 이분법적 구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들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오히려 이런 게임이기 때문에 동료 중 하나가 시스젠더 이성애자 얼라이(ally)였다면 싶다. 안젤라가 그 포지션인 것 같긴 하지만 얘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 외에 3장에서 스토리 진행중 마음의 상처를 받은 샘이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우울한 생각들로 파고 내려가는 장면은 그 내용들이 실제로 트랜스젠더들이 흔히 겪고 지나가는, 사람에 따라서는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불안과 고민들이지만 이걸 언제까지 보여줄 생각이지 싶을 정도로 이어진다. 총 4장 구성에서 3장이 통으로 주인공의 자기성찰에 할애된 건 게임으로서는 아쉽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알겠는데, 그게 플롯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난 게 아니라 메시지를 위해 플롯의 희생을 감수한 느낌. 이러면 이미 그 메시지에 동조하는 사람들 외에는 공감해 주지 않는다.
아날로그 · 헤이트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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