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서 비주얼 노벨 태그로 검색해보면 한글로 된 섬네일이 박힌 어느 게임이 눈에 띈다. 일단 담아보고 나중에 정보를 확인했는데, 한국의 동인팀이 아니라 캐나다 제작자가 만들었다고. 처음에는 전작인 아날로그를 일단 기동시켜본 뒤, 약 15분쯤 플레이하다가 언어를 한국어로 교체했고, 이후 후속작 헤이트 플러스까지 한국어로 플레이했다. 게임의 분위기가 엄밀히 말하면 SF지만 동시에 조선을 모티브로 한 데다 번역도 그 분위기를 잘 살리며 자연스럽게 되었다 보니 이건 한국어로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영어 원문이 어떻다는 건 아니다. 원작자 크리스틴 러브의 조선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유교용어의 번역어 사용도 딱히 이상하게 눈에 띄는 데가 없다. 번역문학을 많이 읽고 연구했음이 문장에서 드러난다. 일러스트레이터는 Raide. 본 시리즈와 크리스틴 러브의 후속작 구속된 레이디킬러 및 다른 팀에서 장애소녀의 작화와 감독을 맡았다.

 

 

 

 

Analogue: A Hate Story

아날로그: 헤이트 스토리 (2012)

 

아날로그는 주인공이 본래의 임무에 실패하고 우주를 표류중인 다세대 우주선 '무궁화'의 로그파일을 회수하기 위해 시스템에 접속하며 시작된다. 아무런 정보 없이 게임을 덜컥 시작하면 유저의 연령대에 따라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터미널 콘솔 인터페이스가 등장하는데, 난 이런 거 매우 좋아하지만 이게 게임의 첫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미묘하다. 커맨드 프롬프트를 어떻게 쓰는지가 아니라, 애초에 그게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 요즘 얼마나 많은데.

 

게임은 무궁화에 남겨진 로그파일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왜 무궁화가 항해에 실패했고, 승무원(혹은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밝혀내며 진행된다. 편리하게도 AI의 언어입력 파서가 오류를 내뱉는 덕분에 원격으로 접속중인 주인공은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거나, 특정한 로그를 AI에게 던져 관련 파일을 더 가져오라는 요청을 하는 식으로 소통하게 되는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없고 선택지를 찍어야 한다는, 현시대 게임이라면 당연한 걸 굳이 납득이 가는 이유를 붙여주는 센스가 좋다.

 

가장 큰 특징은 프리젠테이션. 일단 "화면 하단에 깔린 대가리 달린 대화상자"를 쓰지 않는 건 물론이고, 스토리텔링의 방식도 대다수의 비쥬얼노벨과는 다르다. 파편적인 정보들을 담고 있는 로그파일들을 읽으며 무궁화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스토리텔링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갸루게에서는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니. 얼핏 지루해지기 쉬운 텍스트 게임이지만, 세대간 우주선이라는 SF적인 배경과 조선 후기를 연상시키는 그 우주선 내 생활상의 강렬한 대비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게임 내에서 주어지는 로그파일들 중 절반 이상은 본래의 목적인 '무궁화가 실패한 이유'를 밝혀내는 데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읽어보기 전에는 물론 모르는 만큼 대량의 사료를 쌓아놓고 잡히는 대로 읽는 역사학자의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딱히 싫증나지도 않는 것이, 그 메인스토리 내에서 진행되는 서브플롯들도 다양하고, 제공되는 정보를 머리속에서 이리저리 짜맞추며 외부로부터 격리된 선내의 사회상을 재구성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지적유희이다. 새신부에 대한 훈시글처럼 딱 봐도 아, 이건 중요할 리가 없다 싶은 글도, 당시의 내훈같은 텍스트의 오마쥬로서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야매라도 어쨌건 고전문학을 하는 놈이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다. 빠져들거나, 금방 질려버리고 집어던지거나, 보통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다만 로그를 읽고, 하나하나 AI에게 던지며 반응을 보고, 다음 로그를 읽는 걸 반복하기보다는 약간 추리요소를 더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게임상에서는 결국 주어진 텍스트들을 순서대로 읽으며 게임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진행이 되는데, 그보다는 로그파일들의 행간에 숨겨진 힌트들을 스스로 추리하게 한 뒤, 함선력 322년에 벌어진 사건의 진실에 스스로 도달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이 게임의 두 AI 중 뮤트 루트의 분량이 현애 루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다. 뮤트 루트에서 해금되는 로그파일이 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특히 뮤트가 이 게임에서 무엇을 대변하는가를 생각할 때, 뮤트의 발언력이 현애보다 크게 떨어지는 건 현애가 제작자의 대변인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1인제작을 하다가 지쳤기 때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차라리 후자이길.

 

로그에서 보여지는 무궁화 내의 사회는 성리학에 지배되는 조선후기를 베이스로 하고 있고, 그에 걸맞게 여성인권이 낮게 묘사되어 있다. 게임을 시작하고 처음 만나는 AI인 현애는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문구를 반드시 기억하라고 메모를 던지는데, 현대인 플레이어 대부분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AI 현애에게 당연히 이 사회의 성차별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안에서 시들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고, 또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런 자신에게 동의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 사상을 디폴트로 장착한 뮤트에게 그 메모를 보여주면 여자가 비천하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남성우월을 의미한다고 현애의 해석에 반발하지만, 그게 끝.

 

그보다는 차라리 뮤트로 하여금 남존여비는 속되게 하는 말이고, 본래 의미는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남녀의 역할에 차이가 있으며 무궁화라는 닫힌 세계 속에서 그것이 무궁화와 그 승무원들을 존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주장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별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뮤트로 하여금 당시의 영아사망률과 유산률을 플레이어에게 보여주고, 모든 여성이 가임기동안 7, 8번을 임신해도 간신히 인구가 유지될까 말까 한 상황인데 여성의 역할을 내조와 출산 외로 확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라고 주장했다면 성평등의 가치를 가진 정상적인 현대인이라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특히 헤이트 플러스까지 플레이한 뒤에 더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두 캐릭터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잘 대비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현애는 플레이어의 성별이나 기혼 여부를 묻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접속해온 플레이어를 단순히 '인간', 혹은 대화 가능한 인격체로만 판단하고 있는 것. 그에 비해 뮤트는 만나자마자 이것들을 묻고, 플레이어와 자신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성립시키려 한다. 여기서 본인을 남성이라 답하는가 여성이라 답하는가에 따라 뮤트의 대사와 태도가 많이 달라지는데, 특히 남성이라면 여성 주인공 뮤트 루트 필견. 메X리X 따위에서 말하는 '미러링'보다 효과적이다. 스팀 업적 "Crossdressing"이 뮤트 루트를 남성/여성으로 2회 클리어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자기와 동의해주지 않으면 삐져버리는 현애와 달리 오히려 시시건건 비판하면서도 '너에겐 그럴 수 있겠지'라고 이해는 못해도 인정은 해 주는 건 오히려 뮤트 쪽이라는 건 아이러니. 오히려 현애 쪽이 '왜 이걸 못 알아줘!' 라는 편협해 보일 수 있는 태도를 자주 취한다.

 

플레이 타임은 전 엔딩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4시간 정도. 메인 화면의 오마케 메뉴에서 엔딩 목록을 확인할 수 있고, 그동안 수집한 로그를 확인할 수 있다. 엔딩을 볼 때마다 컨셉아트들이 해금된다.

 

 

 

 

Hate Plus

헤이트 플러스 (2013)

 

헤이트 플러스는 전작이 종료된 직후에서 시작되며, 무궁화에서 태양계로 귀환하는 3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의 엔딩 세이브 파일을 그대로 불러와 이을 수 있는데, 뉴 게임이 아니라 불러오기를 선택해야 함에 유의. 전작에서 현애를 데려왔는지, 뮤트를 데려왔는지에 따라 어느 한쪽이 등장하거나, 아날로그에서 "AI 하렘 엔딩"을 보았을 경우 이 세이브를 로드하는 것으로 둘 다 동시에 등장시킬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진엔딩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날로그로부터의 세이브 파일 없이 이 더블 AI 루트를 개방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모르겠다.

 

무궁화 최후의 날을 다룬 전작과 달리 24세기 지구에서 떠났을 다세대우주선이 왜 조선스럽게 막장화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에 캐릭터 이벤트가 있긴 하지만 우주선에서 조종사와 AI 단둘이 (혹은 셋이서) 무슨 스토리가 진행되겠는가. 무궁화에서 회수된 AI가 주인공의 우주선에서 재구성되면서 메모리에는 없지만 코드 레벨에 더미 데이터로 숨겨져 있던 말살된 기록들이 발견되며 이를 추출, 읽어나가는 진행. 다 읽은 뒤에 로그를 제시하며 반응을 이끌어냈던 전작과 달리 헤이트 플러스에서는 스크롤에 반응해 실시간 반응을 보인다. 덕분에 AI들의 대사량이 전작보다 많고, 대신 스크롤이 때로 버벅인다. 처음에는 AI가 던져주는 대로가 아니라 원하는 순서로 추출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도가 높아진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도 않고, 모든 텍스트를 전부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는데 일부 텍스트는 현애나 뮤트 루트 중 어느 한쪽에서만 등장한다.

 

일단 무궁화가 최소한 민주주의의 껍질이라도 유지한 귀족정에서 조선으로 회귀해버린 과정의 묘사는 빈 구멍이 곳곳에 보이긴 하지만 애초에 주인공의 앞에 놓인 기록들이 파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괜찮다. 오히려 그 귀족정을 수호하려고 하는 세력과,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기반한 전제정치를 만들려는 세력들의 동기가 잘 드러나 있고, 그 중에서 적어도 굵직한 주요 사건들은 대체로 규명되고 있는데다 모든 로그들이 그 사건들에 개입한 당사자들의 손에 의해 남겨진 1차사료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역사학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이상에 가까운 상황. 게임을 클리어하는데는 최소 이틀이 걸린다. 게임 내에서 설명되는 이유로 하루에 읽을 수 있는 로그의 양은 제한되어 있고,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세이브를 한 뒤 12시간을 기다리기 전에는 그 파일을 로드할 수 없다. 정확히 12시간을 딱 기다린다면 이틀에 되겠지만 3일에 걸쳐 할 걸 전제로 하고 있겠지. 만약 기다리기 싫다면 방법은 2가지.

 

로드 화면에서 WAIT 라고 표시된 세이브 위에 커서를 옮긴 뒤 키보드에서 S를 치면 너 그따위로 게임하지 말라는 제작자의 잔소리를 듣고 "나는 머저리야"라는 선택을 통해 스킵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시스템 시간을 돌리는 것. 그런데 말야. 제작자로서는 3일간 히로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하길 바라는 의도였다는 건 알겠지만, 그 실행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12시간 셧다운제를 거는 건 안일하다. 주인공의 우주선의 손상으로 하루에 사용될 수 있는 전력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에 일정량 이상의 로그를 추출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는 설정이라면 12시간 셧다운제를 거는 대신 리얼타임으로 조금씩 전력이 회복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인간이란 등신같은 동물이기 때문에 그냥 12시간 셧다운이라면 우회로를 찾으려 하겠지만 20분 뒤에 다음 로그 하나를 더 읽을 수 있다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을 거야. 특히 모바일/소셜에 단련된 현대인이라면 말이지. 그리고 그 사이에 게임 진척도에 따라 화면상의 AI를 클릭하는 것으로 시덥잖은 잡담이라도 좋으니 뭔가 메시지를 출력시켰다면?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현애루트 3일째. 난 초견에서 이걸 보고 벙쪘는데, 네타바레를 삼가고 말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이런 게임에서 본 중에 가장 엽기적인 이벤트다. 현애의 어떤 요청을 들어줘야 하는데, 그건 무려 현실에서 현애와 함께 (즉 모니터 켜놓고) 케이크를 먹으라는 것. 거기에 발매 초에는 이걸 사진찍어 원작자에게 보내면 스팀 업적까지 해금해 주었다. 지금은 업적 해제 코드를 공개해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헤이트 플러스에 기록된 무궁화를 조선으로 만들어버린 주동자들이 악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날로그에 기록된 인물들도 김정수 부부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이름을 가리거나 네타바레를 신경쓰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네타바레 주의.

 

오은아에게는 분명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 무궁화의 출산율은 계속 감소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은아가 주장한 것이 유교적 질서를 부활시키고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한시켜 출산에 전념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육지책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고, 오은아의 동기도 100% 순수한 것이라고 보기엔 어렵지만, 이대로 가면 사회의 존속이 불가능해진다는 위기의식에 대해 문돌이가 내놓을 수 있는 차악임은 분명하다.

 

물론 플레이어는 김소이의 연구로그를 통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무궁화의 주민들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것이 여성들의 출산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김소이의 연구가 완료된 직후에 컴퓨터 데이터들이 일제 말소되며 사회가 강제리셋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무궁화 내의 주민들에게 그 연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연구 도중에 잔약신부의 혈액샘플을 채취하는 부분의 묘사에서 이미 무궁화 내의 기술수준은 지구의 그것에 비해 퇴보하고 있었음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김소이 이야기는 분명 비극이지만, 이 로그에서 비쳐지는 내용으로 볼 때 김소이가 몇 년이고 빠르게 연구를 완성해서 공표했다 하더라도 무궁화가 거기에 대처할 수 있었을까? (멀리 볼 것 없이, 현대의 과학자들의 기후변화 경고에 진심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민국가가 지구에 존재하나?)

 

더욱이 무궁화는 헤이트 플러스의 시점에서 이미 항해를 지속하고 있지도 않았다. 헤이트 플러스 시점에서 4세기 전의 무장봉기로 항법 AI가 파괴되어 버려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임을, 작중에서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오은아 로그를 보면 무궁화대학에도 역사학과가 그동안 존재했던 모양이니까. 그렇다면 무궁화에 그 시점에서 남겨진 유일한 선택은 그 닫힌 세계 내에서, 최대한 장기간 유지 가능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현대인인 우리의 시점에서 반민주적이고, 성차별적이고, 반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감정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성격의 체제일지라도 말이지. 아날로그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 내에서 봐도 (즉 뮤트의 시점에서 봐도) 잔혹한 일을 저지른 김정수 부부를 제외하면 잔약신부를 괴롭게 한 주변인들이 과연 악인이라 그랬을까? 나는 인간의 모든 문화와 제도는 결국 물질적 하부구조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무궁화 내의 상황에서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결말이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종족유지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닫힌 세계 속에서 그렇다는 거지, 현대사회에서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니니 오해 말고.

 

결국 내가 이 두 게임에서 느낀 건 캐릭터 게임으로서의 재미가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역사학자의 유희에 가깝다. (솔직히 난 현애도 뮤트도 둘 다 꺼림찍하다) 이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현대인의 잣대로 조선을 평가하는 게 공정하지 않듯이, 이 픽션속의 사회를 평가하는 것도 공정하진 않을 것 같다. 애초에 이 작품의 무궁화호가 어느 현대사회를 빗댄 메타포로 보이지도 않는 데다, 현애의 존재로 이미 충분히 픽션의 틀 내에서 자체비판을 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플레이어 개인의 가치관을 들여다보게 하고는 있을 지 모르지만 이 작품을 소셜 크리틱으로 읽는 건 과대해석으로 보인다.

 

사실 굳이 이 시리즈가 제작자의 어떤 사상을 일관적으로 표한하고 있다고 한다면 여성인권보다는 성소수자 옹호에 가깝지 않을까. 아날로그, 헤이트 플러스 모두 이성간의 사랑보다는 동성간의 사랑을 묘사한 로그가 더 많고, 그 대부분은 레즈비언이지만 헤이트 플러스에 게이커플이 하나 묘사되는데, 현아는 여기에 충격을 받지만 오히려 뮤트가 덤덤히 반응하고, 반대로 레즈비언은 현아가 개방적인 데 비해 뮤트가 반대한다. 아마 헤이트 플러스에서 뮤트가 게이커플에 아무렇지 않은 건 뮤트에 호모포비아가 프로그램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레즈비어니즘이 뮤트가 생각하는 여성의 역할에 반대되기 때문일 뿐이라고 해석할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어쨌건, 잔약신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해 잘 순응해 살아가는 아날로그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동성커플이 두 작품 모두 하나같이 끝이 안 좋다는 점에서 보면 씁쓸하다. 마치 여성인권은 과거에 비해 신장되었지만, 성소수자는 여전하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이후 크리스틴 러브의 후속작 구속된 레이디킬러가 바로 그 LGBT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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