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악마를 알고 있다 (2015)
미국 미드웨스트의 어느 크리스찬 스카우트 캠프. 여기에 보내진 세 명의 '문제아' 비너스, 주피터, 넵튠. 세 사람은 함께 외딴 곳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악마가 나타나길 기다리게 되는데...
원제는 We Know the Devil. 미국의 소규모 제작사 필로우 파이트(Pillow Fight)에서 제작한 비주얼 노벨로, 특정한 시간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거나 악마가 접근하면 경보가 울리는 사이렌이 등장하는 등 다소간의 판타지 요소가 포함된, 하지만 어번 판타지보다는 매지컬 리얼리즘에 가까운 작품이다. 실사를 가공해 만든 배경 그래픽 위에 흑백으로 그려진 인물들, 그리고 음울하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사운드 때문에 호러 분위기를 띄우기는 하지만 호러는 아니다. 아래 소개글에서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겠지만 이 게임에 한해서는 미리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있는 상태라도 즐기는 데 지장이 없다. 아니, 대부분의 장면에서 직접적인 묘사보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초견 플레이에서는 지금 내가 뭘 봤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총 4개의 엔딩이 있으며, 각 루트는 1시간 정도 분량이다.
주인공은 비너스, 주피터, 넵튠. 도중에 나레이션이 있긴 하지만 3인칭으로 묘사되며 특정 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되진 않는다. 게임 전반에 걸쳐 직접적으로 누구는 어떠하다는 식의 묘사가 없이 보여주는 식으로 진행되며, 아래에 캠프파이어 앞에 앉는 세 사람의 모습을 예로 들어본다.
비너스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자리를 최소한으로 차지한달까, 거의 차지하지 않았다. 넵튠은 무자비하게 세련된 모습으로 다른 그룹들을 눈요기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주피터는 다리를 끌어안고 턱을 무릎 위에 올렸다. 바른 자세는 어려워했지만 편한 자세를 취하기는 좋아했으며, 자기 몸 전체를 끌어안는 안심감을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묘사가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대사나 이런 행동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각 인물들의 성격이나 심리상태를 추측해 나가야 하는 것. 적당히 종합해 정리해 보면 비너스는 소심하고 갈등을 피하는 성격으로, 평상시에는 주변의 기대에 최대한 부응하려 노력하고 자기 방어를 하지 못 하는 성격 덕분에 캠프의 다른 참가자들로부터 갈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언제나 온화한 성격인 것 같지만 사실 자기 자신과 세계 전체에 대한 분노를 감추고 있으며, 주피터를 질투하고 있다. 이후 트랜스젠더였음을 자각하며 작중 나레이션의 대명사가 he에서 she로 바뀐다.
주피터는 평소에는 쾌활하고 쿨한 성격의 톰보이를 가장하고 있지만 때때로 그 모습이 깨지며, 본인이 어렸을때부터 주입당한 호모포비아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의 레즈비언이다. 여기에 신체접촉에 대한 타부도 강하게 주입되어 있는 덕분에 로맨스를 두려워한다. 주피터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가 '나쁜 아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며 죄책감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상태.
넵튠은 게으르고 반항적인 성격의 독설가로, 캠프에 술을 반입해 오기도 했다. 스스로 '나쁜 아이'를 자청하며 삐딱하게 행동하지만 이는 카무플라지로, 위 둘에 비해서는 덜 분명히 드러나지만 레즈비언이거나 최소한 양성애자이다. 다른 둘과 달리 넵튠은 스스로 이를 인식하고 있으며, 비너스나 주피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역시 파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이들을 자극해 스스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사회적 통념에 맞는, 그러나 자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할 때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기침을 하는 거부반응을 보인다.
선택지는 총 7곳에 등장하는데, 3명이 모든 장면에서 동시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2+1로 갈라지는 장면에서 이 선택들이 요구된다. 요는 누구와 누구를 함께 행동시키고 누구를 남길 것인가. 처음에는 어떻게 조합을 짜려고 해도 누군가가 비교적 소외될 수 밖에 없도록 선택지가 짜여져 있으며, 플레이 중 가장 소외된 캐릭터가 '악마'에 의해 (대체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다른 둘은 '착한 아이'로 남게 된다. 본작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두 사람이 함께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인데, 이는 셋 중 둘만이 구원될 수 있고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 이는 본작의 캠프 교관의 설교에서 묘사된다.
나도 어렸을 땐 딱히 인싸거나 하진 않았어. 가끔 싸움도 했지만 항상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절친이 둘 있었지. 부모님이 친구 누구 데려오라고 하면 항상 둘 다 데리고 오고 싶다고 대답했어. 나는 나름 두 친구 중 어느 하나를 편애하고 그런 거 없이 잘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중 하나는 좀 거슬렸어. 거슬리는 놈이었어. 찌질대고 같이 어울려 주지 않기도 하고 그랬지.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내가 더 좋은 친구가 되어 덮어주려 했어. 내가 더 좋은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만회해 줄 수 있다 생각했지. 근데 결국 도움은 되지 못했지. 누구도 나도 예상하지 못 했지만 결국 큰,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어. 내가 만약 그 때 그 녀석에게 그만두고 남자답게 처신하라고 했다면 그 반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몰라. 어떤 우정은 사람이 지탱할 수 있지만, 다른 우정은 신의 뜻에 맡겨야만 하지.
결과적으로 1회차 플레이때는 본의든 아니든 가장 소외시킨, 즉 가장 화면에 적게 등장한 캐릭터의 악마화 엔딩을 보게 된다. 엔딩을 담당하는 캐릭터가 역으로 가장 비중이 적었던 만큼 그 캐릭터가 내면에 무엇을 품고 있었고, 어떤 고민을 하다가 무엇을 표출하게 되었는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쉬운데, 모든 엔딩을 회수해 나가는 과정에서 피스가 조금씩 맞춰지는 형식인 것.
이 3개의 엔딩을 모두 보고 난 뒤에는 중간의 선택지에서 3명 모두 함께 행동하게 만들 수 있게 되며 이렇게 되면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세 사람 모두가 '악마'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 엔딩은 다른 개인엔딩들과 달리 호러적인 연출이 없고 서로를 격려하며 자신들의 본성을 받아들이는 엔딩. 본작의 '악마'는 교회 공동체에서 금기시하는 모든 것의 상징적인 존재로, 개인 루트에서 그것을 억지로 대면하게 될 때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했지만 진 엔딩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일까.
우리는 악마를 알고 있다는 미국 중서부의 기독교계 교화 캠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미드웨스트가 사실 문화적 보수성으로는 남부 바이블 벨트나 별 차이가 없는 지역이라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선택된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시골로 내려가면 더욱. 일부 LGBT+ 계열 온라인 미디어에서 극찬한 작품이라 호기심에 플레이해 보았는데, 솔직히 나도 LGBT+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그리 깊게 공감하진 못했다. 어쩌면 내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주요 대사나 묘사 하나하나를 공들여 깎은 건 인정하지만 너무 알레고리에 의지해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이전에 표현 하나하나를 전두엽 굴려가며 분석하다 보면 역으로 감정이 개입되기 힘들다. 그나마 나는 이 인물들이 대충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 대강 짐작이 갔지만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이라면 더더욱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그런 만큼 본질적으로 LGBT+라는 좁은 대상층 외에는 어필하기 힘든 게임인데, 문제는 트레일러나 스크린샷만 보면 평범한 호러 게임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는 곤 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 작품인데, 이건 낚시잖아. 이러면 안 되지.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사회에 의해 주입된 자기혐오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성장 내러티브를 '신'과 '악마'라는 알레고리를 이용해 표현했을 뿐, 이래서는 호러 게임이라 생각하고 플레이한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낄 거 아냐. 여기에 엔딩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이벤트 CG가 없어 스크린샷을 골라내기 좀 힘들기도 했다.
본작은 현재 필로우 파이트 명의로 판매되고 있지만 최초에 발매되었을 때는 데이트 나이토(Date Nighto) 명의였다. 데이트 나이토는 콘라드 크레일링(Conrad Kreyling)이 세운 회사로, 크리스틴 러브의 너무 신경쓰지 마, 자기 이야기 아니니까에 감명을 받아 비주얼 노벨을 만들기 위해 세워졌으며, 중간에 남코와 협력해 남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브라우저 기반 연애 게임인 남코 하이의 제작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풍 비주얼 노벨을 만들다가 201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 작품들의 영문판이 점점 발매되기 시작하자 노선을 바꿔 일본 게임들과는 차별화되는 스타일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 분리된 회사가 필로우 파이트로, 이후 본작의 정신적 후속작 천국은 나의 것을 포함한 실험적인 작품들이 필로우 파이트 명의로 발매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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