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ノ空

종말의 하늘 (1999)

 

1999년 7월 12일, 키타고교의 여학생 타카시마 자쿠로가 세계의 종말을 시사하는 기묘한 말을 남기고 학교 옥상에서 투신자○한다. 클래스메이트의 갑작스런 투신으로 충격에 빠진 학생들, 그리고 교내에는 7월 20일 세계가 끝난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한다. 과연 7월 20일에 세계는 연속성을 상실할 것인가.

 

종말의 하늘은 케로Q에서 1999년에 발매한 세기말 전파계 비주얼 노벨로, 케로Q의 처녀작이며 사요나라를 가르쳐줘, 을 위한 101가지 방법과 함께 통칭 일본 3대 전파게라 불리는 문제작 중 하나이다. 물론 성인용. 발매 직후에는 평범한 학원물 에로게를 기대하고 샀던 유저들이 기대를 시궁창에 내던진 내용에 혹평을 받았지만 반대로 그 전파성 덕분에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지명도를 얻었고 이후 2회에 걸쳐 리메이크되었다.

 

전체 4장 +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각 챕터마다 메인 나레이터가 달라지며, 길게는 7월 10일부터 최대 20일까지에 다다르는 시간이 총 4명의 화자의 시점을 통해 반복해서 전개된다. 최초 플레이시에는 미나카미 유키토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도중의 유일한 분기 선택지에 따라 와카츠키 코토미 혹은 오토나시 아야나 루트로 분기된 뒤 어느 루트이든 종료하고 나면 엔딩곡이 재생되며, 타이틀 화면을 통해 다음 장으로 진입하게 된다. 1회차의 미나카미편에서 어느 분기로 들어갔는가와 무관하게 2장은 와카츠키 코토미 시점에서 진행되지만 내용의 일부가 달라지며, 4장 마미야 타쿠지편 이후 에필로그 역시 다시 1장의 선택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말로 설명하면 괜히 더 복잡해지는 느낌도 드는데, 요는 아래와 같다.

 

 

도입부에서는 소꿉친구인 와카츠키 코토미가 미나카미 유키토를 깨우러 오는 장면에서 시작, 일견 평범한 갸루게 도입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수 분을 채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일변한다. 학교에 도착하면 전날 같은 반의 타카시마 자쿠로가 타교생 2명과 함께 학교 옥상에서 투신자했다는 화제로 술렁이고 있고 미나카미는 그 분위기에서 도망쳐 옥상에서 땡땡이치며 독서를 시작하는데, 그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세계의 시작과 끝, 인과율과 제1원인 등에 대해 생각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끝내는가 싶은데 본작의 전파소녀 오토나시 아야나가 등장. 그녀의 첫 대사는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미나카미가 골몰이 생각하고 있던 내용에 대해 정확한 인용으로 대응한 셈인데, 그러자마자 칸트의 이름을 두고 색드립 말장난을 친다. 하필 학교 옥상인 건 시즈쿠에 대한 오마쥬겠지.

 

 

 

수업이 끝나고 미나카미는 와카츠키의 부활동이 끝나길 기다리며 학교를 배회하며, 수영장 부근에서 타카시마와 비슷하게 이지메를 당하고 있던 마미야 타쿠지와 만난다. 혼자서 뭔가 혼잣말을 반복하는 그를 보며 미나카미는 타카시마의 자○로 충격을 받은 건지 염려하며, 이후 와카츠키와 함께 귀가하는 길에 와카츠키가 전날 학교에서 자○한 타카시마 자쿠로를 만났다고 설명한다. 와카츠키는 부활동 때문에 학교에 왔지만 부활동이 없는 타카시마가 일요일에 학교에 있는 걸 이상하게 여겨 말을 걸었고, 타카시마는 와카츠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함과 함께 "세계는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타카시마 자쿠로에 대해 이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오자와라는 불량소년과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 오자와 역시 3일 전, 사고로 죽었으며 학교 옥상에서 약을 하다 낙사했다는 것. 

 

여기까지의 도입부가 일품인데, 2~30분이 채 지나기 전에 주요 등장인물들을 전부 등장시키며 캐릭터성을 드러낼 부분은 강렬히 드러내면서 동시에 미스테리로 남길 부분은 남기며, 이후 스토리 전개를 위한 배경설명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연출적인 면에서 특히 자○한 타카시마 자쿠로는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미나카미가 완전히 집으로 돌아와 회상에 잠길 때까지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며, 회상에서도 흐릿한 실루엣만이 보이며 호기심을 자극하게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14일, 학교중에는 타카시마 자쿠로의 자○과 무슨 관계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7월 20일, 이제 1주일도 남지 않은 시일 내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루머가 퍼지며, 어제까지 소심해 보이던 마미야 타쿠지의 태도가 일변해 세계의 종말을 말하며 그의 주변에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 이후 스토리가 폭주한다. 이런 노벨 형식의 게임은 설정이 복잡할수록 초반이 늘어지는 작품도 많은 데, 오히려 옛날 게임들이 이렇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 듯. 난 이런 스트레이트한 페이싱 싫지 않다.

 

종말의 하늘은 전파게라 하나 시작부터 전파를 쏘아대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1장의 나레이터 미나카미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인물이며, 다른 과목은 젬병이지만 수학과 물리만은 우수하다는 묘사도 있고 초반에 옥상에서 보여주는 사변도 칸트적 합리주의에 기반해 인간은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 무엇 하나 정확히 판단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는 것. 중2병과 거리가 먼 건전한 결론이다. 여기에 1장의 히로인이자 2장의 나레이터인 와카츠키 역시 미나카미처럼 충분히 현실세계에 발딛고 살아가는 건전한 상식의 보유자로, 학교에 갑작스럽게 유행하는 종말론을 배척하고 그 교주로 각성하려 하는 마미야와 대치한다. 두 사람이 같이 행동하는 장면이 많다보니 1, 2장의 이벤트가 겹치며 같은 대사를 2번씩 보게 되기도 하다보니 반복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 파트가 있기 때문에 점점 격화되는 교내의 비이성적 광기의 대척자 입장에서 전체 작품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석양을 등지고 옥상에 선 소녀들. 시즈쿠의 그 장면에 대한 오마쥬겠지.

본격적인 전파는 3장 타카시마 자쿠로편부터 시작한다. 타카시마는 미나카미, 와카츠키편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자○한 상태지만 본인 루트에서는 그 직전가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타카시마는 단순히 괴롭힘의 대상이었던 정도를 넘어 오자와라는 불량학생에 의해 성적인 착취까지 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에 절망하고 있던 타카시마에게 어느날 수상한 편지가 도착하는데, 타카시마는 전생에서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서 악을 쓰러트리고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전사였으며, 자신들은 과거의 동료를 찾고 있다는 것. 여기까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주위를 둘러싼 불행 하나가 다음날 사라질 것이라는 기묘한 예언을 받게 되고 다음날 실제로 오자와가 학교 옥상에서 실족, 사망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직 반신반의하는 타카시마지만 편지의 지시대로 이들과 만나며, 이미 극한상태에 있던 타카시마는 이들에게 동조, 자신도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믿게 된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전개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일본의 80년대 서브컬쳐 현상 전사증후군을 묘사한 것으로, 한때 오컬트 잡지 (ムー)의 독자투고란이 '자신은 전생에 어느 세계의 전사였다, 당시 이런 이름을 갖고 있던 동료들을 찾고 있다'같은 내용으로 메워졌던 현상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뭐, 당시에 아직 용어가 없었을 뿐 현재 기준에서 보면 그냥 중2병 현상이다. 중2병도 유행을 타는 거겠지.

 

타카시마는 이렇게 만난 전생의 동료들과 함께 전생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혹은 되찾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봉인된 능력을 해방하기 위해 스파이럴마타이라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한다. 스파이럴마타이는 죽음 직전까지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여 봉인된 힘을 깨우는 의식으로 이를 위해 7월 12일 일요일에 학교를 방문, 그동안 반에서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와카츠키 코토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지메의 대상이 되어 있던 마미야 타쿠지에게는 '세상이 20일에 끝나더라도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기묘한 말을 남긴다. 예정된 시간은 다가오고, 정작 이를 제안한 동료들이 제정신이 돌아와 공포에 질려 그만두려는 것을 타카시마가 막아서며 강제하는 형식으로 스파이럴마타이가 거행된다. 그 내용은 학교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 죽기 직전에 전사로서의 힘이 각성했어야 했지만 현실에는 그런 것 따위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4장, 마미야 타쿠지편이다. 타카시마가 자○하기 전날 그녀와 조우해 '20일에 세계가 끝나더라도'라는 말을 들은 마미야는 타카시마의 자○, 그리고 그 3일 전에 있었던 자신과 타카시마를 괴롭히던 오자와의 사고사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며, 학교에 있는 동안 숨어지내던 하수구 아래 공간에서 자기가 낙서로 벽에 그려놓은 '마법소녀 리루루'가 구현화되어 대화를 나누는 환각을 보게 된다. 종말의 하늘의 각 챕터는 철저히 그 캐릭터의 시점에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마미야가 경험하는 이런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정말로 작중의 러브크래프트적인 레퍼런스와 관계된 초상현상인지 단지 그가 착란상태에 있는 것 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순한 환각인가, 아니면 나이알랏호텝의 장난질인가. 본작의 전파성 70% 정도는 이 챕터에 집중되어 있다.

 

아무튼 이후 마미야는 이전의 모습에서 돌변해 과거 자신을 괴롭히던 요코야마 츠요시를 첫 제자로 맞이하는 걸 시작으로 7월 20일에 종말이 오며 자신은 신자들을 '종말의 하늘'로 이끌 구세주를 자청하며, 학교를 중심으로 적잖은 신자를 끌어모으게 된다. 마미야 루트의 전파는 크게 2가지로 마미야 타쿠지의 대사와 그가 보는 환각인지 초상현상인지 알 수 없는 연출의 두 형식인데, 그가 내뱉는 괴문서 중 하나만 따져보자.

 

마미야가 최초로 제자가 되는 요코야마에게 첫 설법(?)을 하는 장면. 마미야는 자신과 요코야마는 같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세계로 인식하게 하는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며, 같은 대상을 보고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단지 언어의 일치일 뿐이라고 한다. 여기에 평생 장님이었다가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 맹인의 예를 들며 그에게는 세계가 보이지 않고 빛의 덩어리들만이 보일 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 빛의 다발을 해석하고 의미를 붙여 우리가 보는 '현실세계'를 재구성하는 건 인간의 인식이고, 이와 같이 우리는 객관적 세계를 즉자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들어오는 빛의 다발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 현실세계라 부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중2병 전파가 아니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 부분을 나름 요약한 것이다.

 

 

 

다만 오해가 없도록 덧붙이자면 딱 거기까지로, 마미야는 칸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칸트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와 그가 물자체(Ding an sich)라 부른 인식과 독립된 외부세계를 분리한 건 되먹지도 않은 형이상학을 차단하고 합리적인 이성의 한계점을 분명히 긋기 위함이었지만 마미야는 그 반대로 요코야마의 이성적인 판단을 해체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이를 활용할 뿐이다. 마미야가 직전 장면에서 수업을 시작하려는 교사를 제지하며 러셀의 세계 5분전 가설을 언급하는 것도 비슷한 의도일 것이며, 감각정보를 비롯한 어떤 지식도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으며 이후 도덕관념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단정하는 것도 같은 의도이다.

 

그렇지만 확실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건 그것이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미야의 설법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며, 그 역시 다른 학문이나 도덕이 '거짓'이라 단정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순수이성비판은 러프하게 요약하면 칸트가 자신의 인식론에 기반해 형이상학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순수한 선험적 지식으로서의 수학과 경험적 지식으로서의 자연과학을 긍정하는 내용이며, 이후 초월적 존재나 형이상학적 관념을 전제하지 않는 도덕율을 세우는 책이 실천이성비판이다. 즉 칸트를 제대로 읽었을 거라 생각되는 미나카미 유키토라면 모를까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 못하는 다른 고교생들, 그것도 스트레스와 불안에 피폐해져 있는 학생들 앞에서 마미야는 자신을 구세주로 선언하고 자신이 부정한 통속적인 인식론과 도덕율을 부정하고 자신의 기묘한 형이상학과 신비체험으로 대체하며, 칸트를 빌려 칸트가 제일 싫어했을 결론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즉 작중에 보여지는 마미야의 전도문은 의도를 갖고 계산된 텍스트이며, 시나리오 라이터인 스카지(SCA-自)가 단순한 중2병 문서를 늘어놓은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갖고 사이비종교의 교주를 그려내기 위해 철학적인 인용을 끌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 다양한 사이비종교가 난립했던 사정상 이 정도는 충분히 현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했다는 듯 한데, 그러면 1장의 미나카미가 하필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며 여러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으로 못박은 것 역시 건전한 이성을 대표하는 미나카미와 광기에 사로잡힌 마미야라는 두 주인공의 대립구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

 

 

 

종말의 하늘을 플레이하고 대체 이 작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싶어도 그럴 만 하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작중에서 7월 20일에 정말로 종말이 발생했는가 여부. 최초 챕터에서 누구 루트로 들어갔는가에 따라 에필로그의 내용도 다소 변하기도 하고, 너무 자세한 걸 이 자리에서 스포일러하고 싶지도 않으니 약간 도식적으로 요약한다면 가능성은 2가지다.

  • 종말은 오지 않았다. 7월 21일은 정상적으로 찾아왔으며, 에필로그에서 보여지는 세계가 정말 이전의 세계와 동일한 세계인가라는 질문은 사변적인 것에 불과하다. 7월 20일 미나카미가 본 '종말의 하늘'이나 7월 21일 갑자기 학교에서 눈을 뜬 것 등으로 보이는 건 전일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한 환각일 뿐이다.
  • 종말은 실제로 발생했다. 작품의 세계는 7월 20일로 종료를 맞이했으며, 7월 21일은 이후 미래를 상실하고 영원히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이며,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것은 그 무한루프 중 하나의 스냅샷에 불과하다. 

이와 별개로 마미야와 신자들이 정말로 '종말의 하늘'에 다다랐는가 역시 2개의 가능성이 남는다. 즉 다음과 같은 조합이 가능하다.

  1. 세계가 종말을 맞이했다. 마미야와 신자들은 완벽한 세계인 '종말의 하늘'에 다다랐으며, 종말 후 같은 7월 21일이 무한루프되는 세계로부터 피신할 수 있었다.
  2. 세계가 종말을 맞이했다. 마미야와 신자들은 '종말의 하늘'에 다다르긴 커녕 단지 개죽음을 했을 뿐이지만, 적어도 무한루프의 종말을 피할 수는 있었다.
  3. 종말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말의 하늘'은 실재했으며, 마미야와 신자들은 여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4. 종말이 발생하지 않았다. 마미야와 신자들의 집단투신은 타카시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없는 집단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플레이어에게 의도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열린 엔딩으로 끝나는 만큼 이 중 어느 해석이 옳은가를 굳이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 않을까. 그보다 중요한 건 플레이어가 위의 어느 결론에 다다르든지간에 '이건 정신나간 스토리'라고 인식했다면 전파게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어디까지가 초상현상이고 어디까지가 환각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마미야 루트에서 카오스 헤드와 비슷한 주파수의 전파가 느껴져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두 작품 모두 망상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핑크색 머리의 픽션 속 마법소녀를 망상 속에서 구현화한다는 점도 닮았는데, 카오스 헤드종말의 하늘을 참고했던 걸까.

 

 

 

종말의 하늘은 아는 만큼 보이는 작품이라고도 한다. 나는 칸트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이성과 신비,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의 대치를 묘사한 작품으로 이해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보다 러브크래프트 신화나 노스트라다무스, 혹은 내가 주목하지 못한 다른 어떤 요소를 토대로 이야기를 해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방식은 결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서 좋다고 할 수 없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자기가 원하는 이런저런 소재를 차용해 스토리를 진행하며 알아볼 사람만 알아보라는 식의 이런 전개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으로서는 실격이지. 자기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

 

여기에 같은 스토리를 다른 4명의 시점에서 교차적으로 전개하는 전개방식은 매력적이지만 상기한대로 1, 2장은 아무래도 겹치는 이벤트가 많이 발생하다보니 2장의 템포를 떨어트린다. 그에 비해 3장의 타카시마편은 30분 정도면 끝날 정도로 짧고 빨리 지나가다보니 타카시마가 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자신이 전생에 전사였다는 것을 굳게 믿고 동료들을 선동해 투신자○에 이어지는지에 대한 경위가 억지스럽다고 느껴질 지도. 

 

스토리 외적으로도 99년작, 그것도 케로Q의 처녀작이었던 점 때문인지 기술적으로도 상당히 모자라는 작품이다. 대사를 넘기는 데 키보드에는 반응하지 않고 오직 마우스 클릭만으로 대사를 넘길 수 있으며, 오토플레이나 백로그같은 편의기능이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페이싱면에서도 중간중간 흐름이 끊어지는데, 페이싱을 끊어먹는 가장 큰 요소는 섹스신. 사실 이런 아마추어스러운 완성도의 텍스트 중심 게임이 에로게이기라도 하지 않았으면 시장에 나오자마자 소멸했을테니 이런 장면이라도 넣는 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만 너무 길고, 늘어진다. 장면에 따라서는 왜 이 시점에서 그런 장면이 나와야 하는가의 당위성이 느껴지지 않기도 하고.

 

 

 

종말의 하늘은 이후 2번에 걸쳐 리메이크되었다. 첫 번째 리메이크는 2010년작 멋진 나날들: 불연속 존재로 전체적인 흐름을 그대로 유지하되 원작의 첫 번째 나레이터였던 미나카미 유키토가 여성으로 설정이 변경되고 와카츠키 코토미가 2명의 쌍둥이 자매가 되는 등 대량의 설정 변경과 내용 수정이 가해진 게임으로, 개발사는 이를 캐릭터 모티브와 스토리 일부 요소를 채용한 별도의 게임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하니 멋진 나날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분리한다.

 

두 번째 리메이크는 원작의 내용에 보다 충실한 2020년 리메이크판 종말의 하늘이지만 이는 단품으로는 구할 수 없고 멋진 나날들의 10주년 기념판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 리메이크판은 플레이해보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삼가겠지만 3장 타카시마 자쿠로편의 내용이 보다 보강되었고 신규 파트로 요코야마 야스코편이 추가되어 전체적으로 볼륨이 늘었다고 한다. 이 리메이크판이 별도 판매되지 않고 있는 건 아마 서로 경쟁관계가 되는 걸 우려했기 대문이겠지. 99년작의 비주얼 리메이크인 만큼 가격대도 높게 책정하기 힘들 테고, 종말의 하늘만 플레이하고 대신 멋진 나날들을 스킵하는 걸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고, 속마음은 본인들만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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