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아토 (1996)

스무살 대학생 카시와기 코이치. 8년 전부터 별거해온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오랜 시간 발길을 끊었던 본가로 돌아와 사촌 카시와기 4자매와 재회하지만 그와 함께 매일밤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자기 내면에 잠들어있던 살육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짐승이 깨어나려는 걸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악몽에 시달리며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것 뿐. 그러던 어느날 밤, 끝내 내면의 짐승이 풀려나 묻지마 살인을 벌이는 악몽으로부터 깨어난 코이치는 아침 뉴스에서 그 사건이 단지 꿈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졌음을 알게 되는데...

 

키즈아토시즈쿠에 이은 리프의 비주얼 노벨 시리즈 2번째 작품으로, 반년만에 만들어진 후속작이며 물론 성인물이다. 시즈쿠 개발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기획이 시작되어 일시적으로는 동시에 개발되었다고 하며, 전작의 '독전파'에 이어 '내면의 야수'를 컨셉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이어가면서도 일본식 전기물 요소가 크게 강화되었다. 전체 볼륨이나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 분명 전작을 능가하는 부분도 많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의 후광이 없는 둘째에 불과해 현재에 와서는... 잊혀졌다고까진 할 수 없지만 딱히 크게 주목받지도 않는 그런 느낌의 작품. 뭐, one of them의 숙명이지.

 

이후 2002년과 2009년에 2회에 걸쳐 리메이크되기도 했으나 여기서는 PC-98로 발매된 구판을 다룬다. 시즈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호러색이 짙고 어두운 분위기의 게임이라 화사한 그림체보다는 역시 이 칙칙함이 더 작중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으니까. 여기에 리뉴얼판에서는 스토리가 일부 변경되고 2009년판에는 추가 히로인도 등장하지만 으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음, 사족? 아니, 원작의 공략불가 캐릭터들의 루트를 추가해 준다거나 하는 정도면 모를까, 90년대 일본 시골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신규 캐릭터로 아키하바라에서 튀어나온듯한 메이드가 등장하는 건 좀 무리수야.

 

 

 

메인 스토리가 단 하루 사이에 발생하고 완결되어 좋게 말하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빈약했던 전작 시즈쿠에 비해 키즈아토는 충분한 분량과 시간을 들여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다수의 조연들이 나름의 비중과 역할을 갖고 등장해 보다 완성된 느낌을 주지만, 전체 스토리의 70% 정도가 공통루트이고 그 사이사이 고른 선택지에 따라 후반부 스토리가 분기되는 방식이라 살짝 반복감이 든다.

 

본작의 주요 미스테리는 카시와기 코이치가 꾸는 악몽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의 꿈 속에서 벌어진 엽기살인사건들의 범인이 정말 코이치인가 제3자인가, 만약 제3자라면 왜 그가 이 장면을 악몽으로 보고 있는가로, 각 루트를 밟는 것으로 그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치즈루 루트에서는 코이치의 악몽과 카시와기 일족의 저주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만 진범은 드러나지 않으며, 진범은 아즈사 루트에서 등장하지만 이 '내면의 짐승'의 정체는 카에데와 하츠네 루트까지 가야 드러나는 식인데, 각 루트마다 분위기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르가 달라진다.

 

여기에 루트를 밟는 순서도 고정되어있는데, 특정 엔딩을 보는 것으로 선택지가 추가되며 새로운 루트가 해금되는 카마이타치의 밤 방식을 어설프게 답습해버린 덕분에 플레이 순서가 완전히 고정되어버렸다. 최초에는 어떻게 굴러가든 카시와기 치즈루 루트의 배드엔딩으로 향하게 되며 배드엔딩을 본 이후에 치즈루 굿엔딩이나 도중 카에데, 하츠네 루트 선택지가 추가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루트가 해금되는 식. 여기에 아직 시스템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시기라 이렇게 회차에 따라 해금되는 메타데이터가 세이브파일과 별도로 시스템에 기록되는 게 아니라 특정 세이브파일에 묶여있어 다소 귀찮을 수 있다. 아무 엔딩이나 1회 이상 보면 마지막 세이브파일의 '1회차' 표시가 '2회차'로 바뀌며, 이 2회차 표시가 찍힌 파일을 로드하여 도중부터 이어서 하거나 아니면 이 세이브를 로드하면서 '이어하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을 선택해야 하는 것.

 

 

 

이후 게임들에서는 이런 회차에 따른 해금요소가 별도로 저장되지만 키즈아토는 아직 시즈쿠의 시스템이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있어 그러한데, 세이브 슬롯 3개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지만 클리어 회수 기록이 모든 세이브에 동시에 갱신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만약 도중 선택지 앞에서 2번, 다음 선택지 앞에서 1번에 저장하고 엔딩을 보았다면 그 엔딩을 본 기록은 1번에만 표시되며 2번 세이브를 로드하면 직전 클리어 기록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처음부터 여러차례 반복 플레이를 필요로 하며 SHIFT + ENTER를 통해 이미 읽은 부분은 문장 단위가 아니라 페이지 단위로 표시해 넘길 수 있게 되지만 이후의 게임들처럼 다음 선택지가 나타날때까지 자동으로 휘리릭 넘기는 게 아니라 여전히 수동으로 넘겨야 하는 건 시즈쿠와 동일. 여기에 같은 페이지 내에서 스탠딩 CG의 표정이 바뀌는 연출이 나올 때마다 스킵이 끊기는데, 전작에 비해 이런 연출이 더 자주 등장하다보니 스킵이 중간중간 툭툭 끊기게 된다. 그래도 배드엔딩을 보거나 굿엔딩 이후 새로운 루트가 해금되면 스탭롤 이후 힌트가 등장하니 이를 유심하게 보면서 플레이하면 공략 자체는 어렵지 않다.

 

각 루트의 출현조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치즈루: 1회차에서 치즈루편으로 고정. 배드엔딩을 1회 이상 보고 굿엔딩 달성 가능
  • 카에데: 치즈루편에서 배드엔딩을 1회 이상 보면 해금
  • 아즈사: 치즈루편에서 배드엔딩을 1회 이상 보면 해금
  • 진범: 아즈사, 카에데 굿엔딩을 보는 것으로 해금
  • 하츠네: 야나가와 엔딩을 보는 것으로 해금
  • 오마케: 하츠네 굿엔딩을 보는 것으로 해금

브랜칭 트리 구조인 걸 감안하면 제절초보다는 카마이타치의 밤을 의식한 것 같지만 이런 구조 덕분에 선택지가 선택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플레이 방식이 실질적으로 고정된다. 그나마 엔딩 크레딧 이후의 힌트를 통해 다음 플레이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고, 대부분의 선택지가 누구의 비위를 맞출 것인가로 알기 쉽게 제시되기 때문에 공략 자체는 어렵지 않다.

 

 

 

아무튼 치즈루편은 미스테리와 호러 요소를 중심으로 하지만 클리프행어로 끝난다면 그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에 나서며 진범의 정체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는 건 아즈사편. 여기에 아즈사, 카에데 루트까지 클리어하면 진범 시점에서의 보너스 시나리오가 출현하며 아즈사편까지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디테일들이 드러난다. 여기까지만 하고 끊었어도 무방할 것 같은 느낌도 드는 게, 카에데 루트에서는 현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오니 전승과 코이치의 '내면의 야수'의 관계가, 하츠네 루트에서는 해당 오니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밝혀지지만 그 전개방식 덕분에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치즈루, 아즈사편이 오프닝부터 공통루트에서의 전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루트로 넘어가게 되는 반면 카에데, 하츠네는 도중에 플롯에서 이탈해 새로운 스토리를 시작해 버리는 걸 보면... 글쎄, 일단 아즈사 루트까지를 작성한 뒤 네타가 떨어졌음을 직감한 게 아닐까. 어쨌건 공략 히로인으로 기획된 카에데와 하츠네 루트가 필요하긴 할 것인데, 공통루트 전개상 진범이 달리 있다고 전제하고 찾아나설 동기를 가진 건 아즈사 뿐이다. 그러니 카에데, 하츠네 루트에서 진범루트에서 드러나는 뒷이야기를 드러나게 하기엔 스토리의 정합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럼 남는 건 아무말이라도 생각해 내 내용을 채우는 것 밖에 없지.

 

그 아무말의 내용은 사실 카시와기 일족은 외계인의 후예였고, 인간을 사냥하러 온 '엘크'라는 수렵종족이었다는 것. 본래라면 인간이 당해낼 수 없는 강력한 종족이었지만 엘크들의 왕녀 중 하나가 인간을 사랑하게 되며 배반하고 전세가 뒤엎어져 그 혼혈로 생겨난 가문이 현재의 카시와기가이며, 덕분에 현재까지도 엘크의 본능이 사라지지 않고 유전자 레벨에 잠들어 있었다는 이야기. 설정덕후들이 좋아하기도 하겠고 시즈쿠의 주요 소재가 되는 독전파의 기원이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 것과 비교해 완결성 면에서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완결해 버리니 전반부와는 장르가 달라지고 미스테리와 호러 요소가 완전히 죽어버리는 건 물론, 스토리의 발단이 되는 무차별 살인사건 역시 미완의 상태로 남겨진 채 끝나게 된다. 루트에 따라 전개가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만 오프닝부터 엔딩까지가 하나의 플롯으로 이어지는 정합성은 필요하지 않을까? 설정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발단이 되는 사건을 해결하면서 그걸 드러나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

 

 

카에데 루트 '배드'엔딩. 코이치는 엘크로 각성하고 도망쳐 자유의 몸이 된다.

여기에 등장인물들이 인간과 엘크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아즈사는 본인 루트에서 진범에게 자신은 내면에 잠든 괴물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다른 사람들을 알고 있고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하며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겁쟁이일 뿐이라고 소리친다. 음- 상대를 동요시키려는 작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변에 메이와쿠를 끼칠 뿐인 존재라면 죽는 게 마땅하다는 논리잖아? 작중 카시와기 일족은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져 자신들의 본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멸해 온 일족일 뿐인가.

 

카에데 루트에서는 치즈루가 만약 코이치가 내면의 엘크를 제어할 수 없다면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는 말을 하는데, 만약 작중의 논리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없어 몸을 숨겨야 한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무고한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라는 논조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카시와기 치즈루도 인간이 아닌 건 마찬가지잖아? 나는 인간과 비인간의 갈등을 다루는 다른 작품들에서는 보통 인간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내가 경쟁종의 배제를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엘크가 호모 사피엔스를 사냥하는 포식자라면 그들 역시 포식자로서의 본능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즉 인간 시점이라면 엘크는 당연히 말살해야 하는 적이고, 엘크 시점이라면 인간은 당연히 사냥당해야 마땅한 존재일 뿐이어야지. 작중의 카시와기 일족은 스스로의 본능을 억누르고 자발적 거세를 반복해 온 셈인데, 덕분에 나로서는 주인공보다 작중의 진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내면의 엘크를 응원하고 싶다. 인간은 인간답게, 엘크는 엘크답게, 두 종족 중 하나가 절멸할때까지. 그게 섭리겠지.

 

 

さおりんといっしょ!

아쿠아플러스는 시즈쿠키즈아토를 이어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지만 리프 레이블을 버리고 양지의 산업으로 돌아가기엔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비주얼 노벨 시리즈 3탄의 기획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려다가 현대 학원물로 방향을 수정하게 되는데, 아마도 도키메키 메모리얼의 영향이 컸겠지.

 

그러나 PC용 에로게 시장이라는 건 결국 고정적인 수요는 있지만 그 일정의 매니아 수요를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리프는 자사의 두 작품을 소재로 한 동인지의 출현에 주목, 여기에 올라타기로 한다. 위는 1996년 팬디스크 사오링과 함께!에서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인지를 소개하는 장면. 리프 본인들도 한때 동인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수였던 만큼 자사 작품을 소재로 한 동인지의 출현에 순수하게 고무받은 것도 있겠고, 마케팅 전략으로서도 이렇게 팬덤을 격려하고 인정하는 쪽이 중소기업이 할 수 있는 어떤 켐페인보다 자사 인지도를 확실히 올릴 수 있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포텐셜이 완전히 터진 건 키즈아토가 아니라 후속작 투하트에서지만 초기부터 이렇게 동인친화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그만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순수하게 에로게로서는 평가가 낮더라도 스토리와 캐릭터성에 주목한 팬들의 2차창작으로 지명도를 넓힌다는 공식은 이후 여러 메이저, 마이너 메이커들이 시도하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재현한 예를 들자면 역시 타입문동방프로젝트겠지. 여기에 코나미가 도키메키 메모리얼의 동인활동을 제약하는 걸 넘어 고소까지 해버리는 패착을 저지른 덕분에 90년대 말-2000년대의 동인화력은 투하트에 집중되었고, 아쿠아플러스는 나름 업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지만 에로게 브랜드인 리프가 본체보다 유명해져 어둠의 세계에서 발을 뺄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다. 메데타시 메데타시.

 

 

시즈쿠

시즈쿠 (1996 PC-98) 수업중에 노트에 낙서하며 자신이 발명한 신형 폭탄으로 지구를 멸망시키는 망상을 즐기던 나가세 유스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수업이 이어지던 중, 오오타 카나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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