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차일드 (2014)
카오스 헤드의 시부야 지진으로부터 6년 뒤 후속작.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미야시로 타쿠루는 그 동안 몸을 위탁하고 있던 아오바 요양원을 나와 혼자 트레일러 카에서 생활하고 있다. 정보적 강자를 자칭하는 오만한 성격의 미야시로지만 사실은 이 녀석도 오타쿠. 헤키호 학원의 신문부장이기도 한 그는 6년만에 시부야에서 다시 발생하기 시작한 엽기살인사건들, 통칭 '뉴 제네레이션의 재래'에 흥미를 갖고 추적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적하는 입장에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가 되어간다.
5pb.가 제작한 과학 어드벤처 4번째 타이틀이며 전작들과 달리 니트로플러스가 개발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5pb.가 직접 퍼블리싱, 해외판은 스파이크 춘소프트가 유통했다. 제목을 보면 카오스 헤드의 직접 후속작인 것 같지만 공식적으로는 카오스 헤드, 슈타인즈 게이트, 로보틱스 노츠에 이어지는 4번째 별도 타이틀이라는 것 같다. 이 사람들 기준에선 주인공과 히로인들이 물갈이 되면 별도 타이틀이 되는 건가, 뭐 자기네 작품을 시리즈의 어느 위치에 정의하는가는 자기들 마음이지.
본작은 기가로매니악스라는 이능력과 이를 둘러싼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고등학생들에 의한 주브나일 미스테리/판타지 어드벤처 스토리에 잔혹한 표현과 묘사를 넣어 심의등급을 성인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CG나 텍스트 양쪽에 잔혹한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흔히 그 정도는 카오스 헤드 이상이라 하는 것 같은데 글쎄, 나는 두 작품이 그리 큰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게임 시작부터 연속살인 피해자들의 사망 장면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등 엽기적인 묘사의 빈도가 더 높은 것 같긴 하다. 어쨌건 전작을 무리없이 플레이할 수 있었다면 본작도 수위 자체는 대동소이. 이 글에서는 네타바레가 될 수 있는 장면이나 정도가 고어도, 불쾌도의 레벨이 높은 편이다 싶은 스크린샷은 일단 빼 보려 하겠지만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 열람시 주의.
다만 한 가지, 카오스 차일드가 분명히 선을 넘은 부분이 있다면 이제 중학생이나 되었을 연령대에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미성년자가 잔혹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건 전작 카오스 헤드나 단간론파 시리즈에서도 등장하지만 이들은 최소 고교생 이상이며, 싸이코력으로는 지지 않는 단간론파조차 절대절망소녀에서 의도적으로라고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공격적인 묘사를 회피했음을 생각하면 금기라 여겨진 라인을 넘은 것. 특히 피해자의 그래픽과 평소 묘사 때문에 '어린이'가 피해자가 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쉬운 이 사건의 별칭은 무려 '비실재청소녀.' 나는 여기서 장면의 잔혹성보다 제작진의 노빠꾸에 감탄하며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이 미친놈들, 이대로 계속해줘.
분기 트리거는 전작에 이은 망상 트리거와 신문부실에서 정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매핑 트리거의 2종류. 매핑 트리거는 위와 같이 지도 위에 특정 사건의 지점에 맞는 사진정보를 매칭하거나 거기에 대한 결론이나 의문점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본작을 제법 미스테리물답게 만들어 주는 연출 중 하나. 대부분의 매핑 트리거 파트는 실패해도 정답을 고를 때까지 몇 번이고 선택이 가능하지만 4장의 (작정하지 않으면 실패하기도 힘든 뻔한) 트리거를 2회 연속 실패할 경우 배드엔딩으로 들어가며, 그 외에 카즈키 하나 루트에서 매핑 트리거로 굿/배드 엔딩이 갈리는 지점이 하나 더 있다.
망상 트리거는 전작 카오스 헤드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중 종종 등장해 포지티브/네거티브/패스의 3종류 행동을 택할 수 있다. 포지티브나 네거티브를 선택하면 중간에 미야시로의 망상이 삽입되고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대사를 넘기다 보면 패스.
포지티브 망상은 야시시한 것들도 있지만 꼭 그렇다기보다 개그물에 가까운 것들도 많아 생각보다 시나리오의 텐션을 조절하기도 하고, 루트에 따라 포지티브를 자주 골라야 하는 루트는 그만큼 분위기가 밝은 개그물 느낌에 가까워지는 반면 네거티브는 망상의 대상 인물이 돌변해 위협을 가해오거나 잔혹한 장면을 떠올리는 등 개별엔딩 루트를 고려하지 않고 공통루트를 진행하는 중이라면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게임의 분위기나 템포를 조절할 수 있다. 잠깐 쉬어가는 장면이 필요하다 싶으면 포지티브, 루스하다 싶으면 네거티브, 빨리 넘기고 싶다 싶으면 스킵하는 식.
1회차에는 4장 매핑 트리거 이후 짧은 배드엔딩이 있는 외에 모든 선택지에서 선택한 망상 트리거와 관계 없이 동일한 공통루트로 강제 진입되고 카오스 헤드같은 진입조건만 복잡한 마이너 베리에이션 루트는 다행히도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 루트는 카즈키 하나, 야마조에 우키, 아리무라 하나에, 쿠루스 노노의 4종. 이 망상 트리거의 등장 빈도가 전작에 비해 크게 늘어난 느낌이며 게임 초반에 더 많이 발생한다. 실제로 분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일부 뿐이라 다소 귀찮기도 한데, 그래도 루트 진입을 원하는 히로인에 포지티브, 그 외에 네거티브나 중립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살짝 알기 쉬워졌다. 그 자리에서 감으로 파악하긴 어려우니 원하는 루트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거나 얌전히 공략을 참조해야 하지만 적어도 되돌아 보면 여기가 분기였다는 걸 납득할 수는 있을 정도. 분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대체로 1~3장 내, 등장이 늦은 야마조에 우키가 5장까지의 트리거를 이용한다.
야마조에 우키 루트에 한해서 도중에 다시 분기가 발생해 2종류의 엔딩 베리에이션이 존재하며, 그 외의 다른 캐릭터 루트에도 추가로 배드엔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선택지가 추가되어 있어 배드엔딩의 종류가 많아졌는데, 개중에는 루트의 정식 엔딩에서는 미야시로가 사망하지만 배드엔딩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깨닫지 못 하는 대신 히로인과 함께 살아남기도 한다. 왜 이걸 굳이 배드엔딩 취급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야마조에 루트처럼 그냥 엔딩이 2종류인 걸로 해도 좋지 않았을까.
어른의 사정상 미야시로 주변에 미소녀 캐릭터들이 드글대는 거랑 별개로 캐릭터 루트가 반드시 로맨스로 이어지진 않는다. 루트에 따라 다소 로맨스 요소가 들어가긴 하지만 메인은 아닌 경우도 많고, 그나마 달달해졌다가도 배드엔딩처럼 끝나기도 하니까.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와 별개로 캐릭터 루트 핸들링에 아쉬운 부분이 남는 부분이라면 4개 중 9장 종료후 분기되는 2개는 메인 루트의 사건인 '뉴제네 재래'의 또다른 결말이라 할 수 있을 내용인 데 비해 6장 종료후 분기되는 나머지 둘은 '뉴제네 재래'가 도중에 중단되고 완전히 별개의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점. 이런 건 외전에 들어가야지, 이 루트들도 충분히 한 챕터 분량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사건을 다시 기승전결 해야 하니 그동안 했던 건 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추가로 카즈키 하나는 본인 루트에서는 당연히 비중이 있지만 메인 루트중에서는 아예 없어도 될 정도로 비중이 없는, 메인 스토리가 다 완성된 뒤에 덧그려진 느낌의 캐릭터이다.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니시죠 타쿠미가 카즈키의 게임 친구로 재등장하는 걸 보면 전작과의 연결성을 만들거나 일종의 팬서비스를 위해 추가된 캐릭터 루트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본편에서 비중도 높은 쿠노사토 미오에게 개인 루트를 만들어 줘도 좋지 않았을까. 쿠노사토는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가 공유하는 만악의 근원 '300인위원회'와 반목하면서 슈타인즈 게이트의 마키세 크리스, 하시다 이타루와 알고 지내는 사이인 듯 한데 어쩌면 이후의 다른 게임에 재등장시키기 위해 일부러 여기서는 루트를 생략한 걸 지도.
메인 히로인 중 하나인 오노에 세리카는 도중에 분기되는 캐릭터 루트가 아니라 진엔딩이 곧 오노에 루트인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른 히로인 루트를 전부 클리어한 뒤 해금되는 진엔딩 루트를 선택해 도중 세이브를 하면 '세리카편'이라고 표시된다.) 이 루트에는 본작 최후이자 최대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긴 말은 하지 않겠지만, 다소 씁쓸한 느낌을 남기는 결말인 덕분에 다른 작품들처럼 마지막에 해피엔딩을 원하는 유저들에게는 아쉬울 지도 모르겠다. 나는 만족스러웠다.
전작에서 '망상을 현실화하는 능력'으로 정의된 기가로마니악스 보유자들의 능력이 본작에서는 대폭 제약되어 뭐든 망상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한두가지의 초능력을 가진 정도로 약화되었다. 여기에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도 이렇다 할 광기나 정신이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때로 행동원리가 이상하고 비밀스러울지언정 충분히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행동양식을 보인다.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는 역시 정보조작. 스스로 정보적 강자(情強)를 자청하며 정보적 약자(情弱)들을 멸시하는 미야시로. 정보적 약자, 줄임말로 정약(情弱)은 5ch을 비롯한 일본의 익명 게시판에 상주하는 잉여인간들이 만들어 낸 실제 단어로, 굳이 비슷한 표현을 생각해 본다면 머글? 기성 매체를 불신하고 그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반대중에 비해 인터넷에서 '진짜' 정보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신들은 그런 정약들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내재한 표현이다. 나는 타인들과 다르다, 나는 특별하다라고 믿고 싶은 미숙한 인간들의 정신승리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여기에 미야시로가 게임 초반에 스스로 정보적 강자를 자청하며 드는 예가 하필이면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입자물리학의 사고실험일 뿐이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뭔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슈뢰딩거를 갖다 붙이는 것 자체가 중2병의 클리셰 중 하나기 때문에 게임 시작과 함께 강렬한 셀프디스를 하는 셈. 카오스 차일드는 픽션일 뿐이니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미야시로도 다른 탐정물 주인공들처럼 정말 특별한 존재인지 당연히 알 수 없겠지만 이 장면을 통해 이 녀석의 자칭 '정보적 강자'가 사실 중2병에 불과하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는 것.
그런 점에서 미야시로 타쿠루는 망상증 동지라는 걸 제외하면 전작의 니시죠 타쿠미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니시죠는 평범한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의 중증 오타쿠지만 그래도 세계의 상식과 물리법칙을 의심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각성'에 어려움을 겪고 이것이 작중 갈등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미야시로 타쿠루는 인간관계에 좀 서툴지만 그래도 부활동을 시작해 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리더십도 보여주는 등 비교적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니시죠 이상으로 자기가 만들어 낸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 그러면서도 진엔딩까지 전부 포함한다면 작중의 주요 능력자들 중 가장 현실에 발딛고 살아가는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플레이 중 계속 드는 인상이었는데, 어쩌면 이 게임은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 4작품째가 되며 기존 시리즈 작품들 중 가장 흥행이 좋았던 슈타인즈 게이트를 벤치마크하며 거기에 카오스 헤드의 설정과 요소를 집어넣되, 전파나 중2병 요소들을 살짝 억제하며 전작에 대한 자기반성을 더하는 방향으로 기획된 작품이 아닐까. 주요 등장인물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신문부장으로서 어쨌건 리더 대접을 받고 있는 미야시로 타쿠루와 오카베 린타로, 주인공의 동성 조력자 역할인 이토 신이치와 하시다 이타루, 평소에 덜떨어진 언동을 보이지만 묘하게 예리한 오노에 세리카와 시이나 마유리, 티격태격하면서도 메인 브레인으로서 정보를 제공하는 쿠노사토 미오와 마키세 크리스 등 주요 캐릭터들의 포지션이 많이 겹친다.
여기에 본작의 미야시로 타쿠루는 부원들의 조력을 받으면서도 주동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며 플롯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플롯을 주동하는 역할을 하며 전작에서 계승된 '망상 플래그'와는 별개로 기본적으로 좀 건방져서 그렇지 합리적인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소년탐정에 가까운 역할. 여기까지라면 중반까지가 전파요소와 찌질함으로 뒤덮인 카오스 헤드보다 대중성을 노린 작품이라 할 수도 있다.
다만 제목 앞에 붙은 '카오스' 요소 덕분인지는 몰라도 곱게 마무리시키지 못하고 공통루트 마지막에 모든 걸 한 번 뒤엎고, 진엔딩에서 다시 한 번 뒤엎으며 도중의 미스테리 전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니 순수한 미스테리 어드벤처라 생각하고 플레이했다면 이게 뭔가 싶기도 할 듯. 자세한 설명을 하면 두 작품 모두에 대한 네타바레가 되니 생략하겠지만, 안티-슈타인즈 게이트라는 느낌으로 기획되면서도 그걸 넘어보려 했던 작품이 아닐까. 잔혹한 장면들 덕분에 취향을 많이 탈 수 밖에 없으며 초중반까지 주어진 모든 정보가 언젠가 반전으로 돌아온다 예측하면 대강 맞을 정도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살짝 피곤하고, 때로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게임이라는 점에서는 좋은 작품이다.
카오스 헤드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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