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fold Garden

매니폴드 가든 (2019)

 

William Chyr Studio에서 제작한 1인칭 공간 퍼즐게임. 에셔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불가능한 기하학과 공간의 뒤틀림, 그리고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탈 공간감을 바탕으로 한 비주얼이 눈길을 끄는 게임이다. 시야 소실점까지 빽빽히 반복되며 늘어선 기묘한 구조물들의 군체에는 플레이어를 비주얼적으로 압박하며, 어디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혼란스러운 불가능한 기하학적 실내는 플레이어를 혼란시킨다.

 

매니폴드 가든의 가장 중요한 기믹은 중력이다. 시작 지점에서 눈 앞에 보이는 벽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면 일반적인 게임에서라면 그 시점에서 앞으로 이동할 수 없다. 하지만 매니폴드 가든에서는 버튼을 눌러 눈 앞의 벽을 바닥으로 만들 수 있다. 중력의 방향을 바꾸는 거라고 설명해도 좋겠지만 동시에 카메라도 함께 이동하며 아까까지 벽이었던 것이 새로운 '바닥'으로 기능한다. 즉 정육면체 공간이라면 6개의 면 모두가 바닥이 되며, 만약 밖으로 나가기 위해 천장에 붙어 있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면 그 문이 정면에 놓일 수 있는 면을 바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게임에서는 점프가 불가능하지만 그 대신 주변에 벽이 있다면 그 벽으로 중력을 전환해 (이제는 바닥이 된) 벽을 따라 이동이 가능한 것. 정육면체의 각 면에는 색이 배당되어 있으며, 중력의 방향을 바꿀 때마다 바닥이 된 면이 그 색으로 칠해져 혼란스러우면서도 최소한 내가 어느 색 바닥 위에 있어야 하는지를 기억하며 사라져가는 방향감각을 붙잡을 수 있게 한다.

 

 

초반 튜토리얼의 한 장면. 벽을 타는 게 아니라, 정면의 벽을 바닥으로 만들어 이동한다.
자세히 보면 이 다리의 끝은 지면과 90도로 붙어 있고, 정면의 허공에 뜬 건물들은 무한반복된다.

큐브는 이런 1인칭 공간퍼즐의 전통과도 같은 존재인 듯 여기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큐브는 6방향에 맞는 6가지 색이 존재하며 각 큐브는 오직 그 색에 맞는 중력만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파란색 큐브를 계단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만약 바닥이 파란색이라면 바닥이 있는 곳으로 떨어진다. 이후 중력의 방향을 바꾸면 바닥에 놓인 파란 큐브는 벽에 붙은 듯한 모습이 되겠지만, 이 파란색 큐브는 파란색 방향으로만 중력이 적용되기 때문에 벽에 붙은 채 움직이지 않으며 이 상태에서는 다가가도 들고 움직일 수 없다. 즉 각 색깔의 큐브는 색에 맞는 중력에만 영향을 받으며, 그 색깔의 중력이 적용된 상태가 아니라면 조작할 수도 없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만연체가 되어버리는 내 글솜씨로 길게 설명하면 복잡한 것 같지만 실제로 해 보면 이 중력 기믹 자체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고, 튜토리얼도 충분히 제공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특징은 실외공간이 무한정으로 반복된다는 점. 즉 내 머리 위에 있는 높은 플래폼으로 이동하고 싶은데 중력의 방향을 바꾸는 걸로 이동할 수 있는 루트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까마득한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공간이 반복되기 때문에 수직으로 떨어지면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플래폼 위로 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 점프는 불가능하지만 난간에서 떨어지는 건 물론 가능하며, 낙하중에는 어느 정도 방향을 조절해 원하는 장소에 내릴 수 있고 낙하 데미지 같은 건 없다.

 

다만 카메라가 통째로 돌아가는 중력 전환과 고고도 수직낙하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3D멀미가 심하게 발생할 수 있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계단이 보통 성인 인간 스케일이라고 하면 플레이어의 시야는 고작 허리 높이정도밖에 안 되는 호빗 눈높이에 시야각도 넓은 편이 아니며, 발소리나 카메라 흔들림 등의 멀미 완화 요소도 일체 없다. 중력 전환이나 수직낙하는 그걸 빼 버리면 총 없는 콜옵이니 그렇다 쳐도 자기들이 만드는 게임이 반고리관에 상냥한 게임이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 유저빌리티를 거의 생각하지 않은 듯한 디자인에는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3D멀미는 개인차가 큰 만큼 일괄적으로 어떻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매니폴드 가든은 분명 심한 편에 속하며, 사람에 따라서는 고소공포증까지 느낄 지도 모르겠다.

 

 

수직으로 솟은 빌딩들은 특유의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갓 큐브 회수를 위해 필요한 다크 큐브. 손에 들면 세계가 암전된다.

사실 이 게임은 퍼즐 시스템 자체보다 비주얼의 아름다움과 박력으로 승부하는 게임이다. 위키백과 기사를 보면 메인 제작자인 William Chyr는 원래 건축을 하던 사람으로, 초대형 건축물들의 구조미를 구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하기엔 당연히 그 예산도 초대형이 되어 버리니 그걸 게임에서 구현하는 걸로 선회했다고 한다. 덕분인지 거대 건축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공간들에서는 플레이어를 압도하는 박력을 보여주지만 퍼즐용으로 만들어진 실내 방들은 아무래도 비주얼적으로 심심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위에서 설명한 6방향 중력을 위해 계단은 있어도 경사면이나 곡면을 쓸 수 없어 블럭상자같은 심심한 모습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연산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지 대부분의 애셋들이 단색으로 칠해져 있어 더욱 그렇다.

 

스토리성이 전무한 순수 퍼즐이라는 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참신한 시스템으로 다른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유니크한 퍼즐을 제공하는 게임이라는 건 순수히 호평할 부분이지만, 유사 장르이자 대선배인 포탈이 어디 게임플레이만 좋아서 팔렸나. 잘 만든 게임플레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게임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개성은 캐릭터에서 나오는 거잖아.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 취미로 만든 거라면 모를까, 이게 안 팔리면 어쩌나 걱정했다는 제작자 인터뷰를 보면 매니폴드 가든은 상업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게임이다.

 

아, 물론 그 스토리나 캐릭터가 지리멸렬하다면 없느니만 못하고, 이런 공간퍼즐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는 포탈과 비교하는 건 너무 가혹할 수도 있겠다만... 아무리 건축미학의 표현을 위해 만들었다 해도 게임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든다. 유저빌리티도.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월드가 재구성되며 마치 만화경과 같은 연출이 나온다
여기 2개의 흰 문이 양옆에 붙어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방으로 이어진다.

페이싱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게임 진행에 따라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는데 이게 기존 요소를 새로운 방향으로 활용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새로운 퍼즐피스를 늘리는 느낌이다. 즉 A라는 도구가 있을 때 포탈처럼 이 A로 A', A'', A'''라는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현재 눈앞에 있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A, B, C 중 어느 도구를 사용해야 좋을 지를 고민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속에서 다뤄야 할 변수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데, 공간감각을 엿먹이는 게임의 특성상 그 공간이 머리속에 쉽게 그려지지도 않는다.넓은 공간감은 탐사 게임이었다면 모를까 퍼즐 게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어 지점 A에서 큐브를 회수해 B까지 옮겨 놓고, 몇 번에 걸친 중력 전환을 통해 지점 C의 스위치를 눌러 길을 뚫은 뒤 다시 B로 돌아가 큐브를 갖고 새로운 지점 D까지 이동해 설치해야 한다고 하자. 개념적으로는 어려울 게 없는 구성이지만 각 포인트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전체 공간이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으면 헤멜 수 밖에 없다. 그 공간 자체가 루빅스 큐브처럼 상하좌우로 핑핑 돌아가는 것까지 고려대상에 넣으면 더더욱.

 

매니폴드 가든은 각 챕터마다 갓 큐브라 불리는 물체의 봉인을 풀고 이것을 특정 지점에 옮겨놓는 것으로 한 파트가 끝나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며, 각 서브에리어는 이 갓 큐브의 봉인을 푸는 데 관련된 여러 개의 서브에리어로 다시 나뉜다. 그런데 도중에 퍼즐룸의 연속으로 된 구간이었다면 다음날 이어하더라도 적어도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상대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데 비해 만약 실외의 넓은 공간이나 허브에리어 같은 곳에 돌아와 세이브를 했다 불러오면 어디가 이미 클리어한 곳이고, 어디가 지금 새로 진행해야 하는 방향인지도 헤멜 수 있다. 특히 주변 모든 방향이 똑같아 보인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미아가 되셨습니다.

 

 

갓 큐브를 들면 세계가 이그러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근데 이렇게 쓰긴 했지만 사실 퍼즐이나 길찾기 난이도가 그렇게 극악하게 높은 건 아니다. 백트래킹을 요구하는 구간도 거의 없고, 눈 앞의 퍼즐을 풀며 전진하거나, 전진할 곳이 없어 보인다면 어딘가로 낙하해 이동할 수 있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상기한 3D 멀미. 짧으면 30분 길어야 1시간쯤 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다음날 이어하다 보면 어제 내가 뭘 하고 있었고 여기는 어디이며 이제 어디로 가야 했는지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괜히 더 햇갈리고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이건 내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곳곳에 등장하는 무한히 이어진 공간들과 갓 큐브를 돌려놓으며 보여지는 만화경 이펙트 때문에 각 스테이지별로 완전히 분절된 걸로 느껴지기 쉽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전체 게임이 한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같다. 큐브를 바로 발 밑에 내려놓으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버그를 이용 게임을 뭉텅이로 스킵하는 RTA도 존재하고, 갓 큐브를 하나도 회수하지 않고 (즉 각 스테이지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않고) 엔딩을 보는 업적도 있는 걸 보면 말이지. 버그를 사용하지 않아도 0% 런이 가능하게 설계된 걸 보면 퍼즐의 정교함 면에서는 야리코미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도 느껴지지만, 반고리관에 대한 배려도 좀 부탁해. 난 절반쯤 진행하다 GG.

 

 

포탈 (2007)

포탈 (2007) 2007년 밸브에서 제작한 1인칭 3D 공간퍼즐 플랫포머. 개인적으로 포탈은 잊어버리고 있다 보면 어느날 문득 다시 하고 싶어지는, 그런 게임 중 하나이다. 게임을 하는 데 별다른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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