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chronizacja

신흐로니자치야 (2022)

 

폴란드의 인디 제작팀 카오스 게임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뉴에이지 SF 비주얼 노벨. 제목은 폴란드어로 동시성 내지 동기화 정도의 의미로, 영어 synchronicity와 synchronization 양쪽에 대응한다. 이전에 아케르 페른을 소개하며 함께 언급했던 게임인데, 아마 현시점에서 이 블로그에 소개된 게임들 중 가장 접근장벽이 높은 게임이 아닐까. 게임 자체는 스팀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지만 현재 폴란드어 외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 그런 걸 소개하는 의미가 있냐고 한다면... 아마 없겠지. 그저 내 호기심 가는 대로 할 뿐.

 

게임을 시작하면 2종류의 게임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인터페이스가 삭제되어 스킵은 물론 세이브나 로드를 할 수도 없는 모드이며 다른 모드는 평범하게 인터페이스를 이용할 수 있는 모드. 이런 아이언맨 모드 비슷한 걸 노벨 게임에서 시도한 건 재미있는 아이디어긴 하지만 적어도 오토세이브가 지원되는 환경에서 이런 걸 해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게임 자체가 그리 길지는 않으며, 한 루트를 클리어하는 데는 길어야 3-4시간, 광클하면 물론 더 금방 끝난다. 아마 제작자들도 그렇게 될 걸 의도하고 넣은 거겠지. 이 모드로 플레이해야 얻을 수 있는 업적들도 있다.

 

누군지 모를 화자에 의한 '선택'에 대한 짧은 독백을 담은 프롤로그를 지나면 두 개의 메인 루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며, 각 루트는 시나리오적으로 접점이 있기는 하나 별도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두 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이다. 평소라면 적당히 도입부까지만 서술하고 전체적인 플롯 구조나 주제의식 같은 이야기로 넘어가겠지만 이번에는 직접 플레이 가능한 유저층이 너무 협소한 걸 감안해 진상까지 전부 네타바레 하기로 한다.

 

 

비비안 루트의 폴과 비비안

첫 번째 루트는 8022년의 비비안 루트. 지구를 말아먹고 생존을 위해 우주로 발길을 옮긴 인류, 화성을 시작으로 성간여행과 우주 개척을 시작한 미래를 그린다. 비비안이 탑승한 우주선 카코스트카(Cacost`ka) 역시 화성제국 소속으로 7421년에 화성을 떠났다. 즉 이 우주선들은 다세대 식민선이며 비비안은 이 우주선에서 나고 자란 것. 작중 26세.

 

이 이민선 내의 사회는 카스트 제도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당한 수준의 감시사회로 묘사된다. 사랑이나 육체적 관계는 선내의 어느 카스트에도 자유롭게 허가되지 않은 타부이며, 신체기능이나 호르몬 레벨 등도 관리대상으로 비비안은 생리를 경험한 적이 없다. 아마도 인구 통제를 위한 것이겠지. 비비안은 이 정적인 사회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자유란, 사랑이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과거 지구 인류가 만든 영화에 빠져 살고 있는데, 그런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상담할 수 있는 대상은 폴과 에아몬. 폴은 이민선 내 사회의 상식에 기반한 대답을 제시하는 반면 에아몬은 수 세기에 걸쳐 비밀리에 이민선 내에 잠입해 다양한 카스트의 인간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형 안드로이드라는 설정으로 폴과는 다른 방향에서 비비안이 제시하는 문제들에 접근해 조언을 해 준다. 비비안이 이런 도시전설같은 존재와 어떻게 알고 지내게 되었는지는 후반에야 드러난다.

 

 

 

그러다 긴 여정 끝에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대기를 가진 슈퍼어스 행성이 발견되었고 탐사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비비안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온다. 비비안은 여기에 즉시 지원하고,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던 폴도 함께 지원해 다른 탐사대와 함께 새로운 행성으로 향하는데, 이 부분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느껴진다. 성간비행이 가능할 정도인 자들이라면 일단 궤도에서 먼저 행성을 조사하고 소득이 있을 만한 장소에 조사대를 파견할텐데, 작중에서는 사전정보 없이 대충 떨궈놓고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니 도보 2시간 거리에 버려진 유적이 있었던 것. 처음부터 저기 건축물로 보이는 게 있으니 근처에 탐사선을 내렸다는 식의 묘사가 있었다면 더 자연스러웠을텐데.

 

그러나 분명 새롭게 발견된 행성이어야 할 텐데 거기에는 인간의 흔적이 있다. 평범한 인간답게 이 상황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폴과 달리 비비안은 드디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어차피 여기서 살 거면 진짜 공기를 마시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우주복의 헬멧까지 벗어던진다. 함께한 다른 동료가 지원을 부르러 간 사이 기다리며 비비안은 폴로 하여금 헬멧을 벗게 하고, 이민선 사회의 타부를 깨며 처음으로 키스를 나눈다. (우주선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행성'에서 살고자 하는 모습에서 아시모프의 네메시스의 주인공 마를렌이 모티브가 된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이후 동료들과 다시 합류해 캠프를 하고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어느 지하시설을 조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발견한 건 분명한 인간의 흔적. 인간을 냉동보존하기 위한 시설과 각종 문서들을 발견하지만 거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은 없었고, 시설을 탐사하다 눈부신 흰 빛을 마주하며 정신을 잃는다. 정신을 차려보면 에아몬과 재회한다.

 

 

마그누스. 스페리스타 교단의 옷을 입고 있다.

두 번째 루트는 더 먼 미래, 10753년의 마그누스. 게임 시작 시점에서는 마약중독자로, 스페리스타(Sferista)라는 교단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어두침침한 방에 숨어있다가 교단에 끌려가 강제로 3개월에 걸친 지옥같은 디톡스 과정을 거친다. Sfera는 영어의 sphere, 기하학의 '구체'부터 '권역' 등을 포함하는 단어. 마그누스가 3개월에 걸친 디톡스 과정을 마치며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스페라'가 전신을 감싸는 하얀 빛으로 묘사되는데, 비비안편에서 마지막에 비비안과 폴이 정신을 잃게 한 그 빛이 아닐까.

 

이후 제정신을 차린 마그누스를 통해 10753년의 상황이 설명되는데, 마그누스가 살아가는 세계는 기계에 의해 인간이 지배받는 행성 나르하쿨리스(Narchakulis). 한때는 인간이 우주를 지배했으나 화성제국과 (비비안편의 우주선 이름을 딴) 카코스트카 동맹간의 제2차 냉전이 언급되며 이후 몰락한 인간을 구원한 기계들이 통제권을 넘겨받아 기계가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이었을 기계들에게 길들여졌으며, 폭력과 전쟁이 종식된 평화로운 세계가 실현되었지만 도시는 슬럼화되고 인간은 권태를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가고 있다. 이 행성이 8022년에 비비안편에서 발견된 같은 행성인지는 불명.

 

재활을 마친 마그누스는 교단의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러 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뭔지 모를 이유로 기계들에게 쫓기게 되며 비비안편에서 등장했던 폴이 수염을 잔뜩 기른 모습으로 재등장해 그를 구출하고 안드로이드 에아몬과 만나게 된다. 에아몬은 이 시대에는 크바르츠(Kwarc; 석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마그누스가 그와 만나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일이고, 에아몬 자신이 마그누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에아몬. 위는 비비안 루트 배드엔딩에서 보여지는 클로즈업.

이쯤에서 알 수 있겠지만 본작의 진 주인공은 비비안도 마그누스도 아닌 에아몬=크바르츠이다. 본작은 사실 언어의 장벽 이전에 대화의 70% 이상이 현학적, 철학적인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어 읽기에 피곤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말이 많으며 작중에서 비비안과 마그누스의 멘토... 아니, 구루에 가까운 역할을 맡는 것도 에아몬이다. 

 

작중 비비안 루트에서 카코스트카 최하층 카스트 구역에 잠복한 상태로 처음 등장했을 때는 비비안에게 과거 지구인들이 화성을 식민화하며 적응을 위해 대규모의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행했다는 설명을 해 주는데,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인류를 비비안은 초인(nad-człowiek)이라 부르지만 에아몬은 인간 스스로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탄생한 신인류를 신(bog)이라 부른다.

인간이 자신의 의식을 확장하고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범주에 따라 스스로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인간은 신이 됩니다. ー에아몬

 

이 우생학 프로그램 '프로옉트 소달리트(Projekt Sodalit)'의 중심에는 2211년에 태양계에서 우연히 발견된 외계 우주선에 실려 있던 일로다 바이오매스, 통칭 "우주 샐러드(sałata kosmiczna)"라 불리는 물질이 있다. 작중에서는 인간의 DNA에 간섭해 물리적, 정신적 구조를 변화시켜 더 높은 경지의 존재로 끌어올릴 수 있는 물질처럼 묘사되며, 이 바이오매스에 대한 실험을 통해 인간은 조금씩 스스로를 개량해 나가며 화성에 정착하고, 다시 다른 우주로 뻗어나갈 계기가 된다. 마그누스 루트에서는 음식처럼 경구섭취하는 걸로 묘사되며 맛있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티모시 리어리같은 사람들이 환각제 사용이 정신과 자아의 확장을 가져와 더 높은 경지, 마치 깨달음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의 강화판 정도로 보여진다. 

 

 

 

선택지를 잘 골라 각 캐릭터의 굿엔딩 루트로 들어가면 에아몬의 진짜 임무를 알게 된다. 에아몬은 더 먼 미래에서 파견된 안드로이드로, 그가 출발한 미래의 인류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구현한 상태였다. 인간과 기계가 조화롭게 살아가며 폭력과 전쟁이 사라지고 영생까지 손에 넣었지만 그 인류는 지루함과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류는 마지막 프론티어인 시간을 정복하고 이세계의 가능성을 연구하는 데 도전하게 되며, 그 결과 우주 샐러드를 2211년의 태양계로 보내며 세계의 미래를 개변시킨다.

 

에아몬이 출발한 미래와 2211년의 우주 샐러드 출현으로 개변된 세계선의 미래는 별도의 세계선에 존재하는 듯 보이며, 이 두 세계선 사이에서 한쪽은 인간이 신이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계가 신이 되어 있는 것. 

중앙에 틈이 갈라져 있는 체스판을 상상해 보세요. 한쪽에는 흰색 폰들이 있고 다른쪽에는 검은색 폰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극단을 나타냅니다. 서로 공유하는 부분은 없지만, 이들은 체스판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합니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이 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체스판 위에는 흰색 폰들의 세계와 검은색 폰들의 세계 외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두 세계를 하나로 결합한다면, 이 두 세계의 최상의 결론들을 하나로 합쳐 이상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갈라진 틈 속에서 새로운 세계, 최선의 선택들의 세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ー에아몬

 

에아몬 자신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세계에서도 인간들처럼 권태에 시달리거나 하지 않았으나, '인간 형제들'을 위해 이 임무를 수행하며 두 미래를 동기화시키기 위해 자질이 있다고 판단한 비비안과 마그누스에게 각각 접근했던 것. 정황상 비비안은 8022년에 이미 '동기화'를 통해 초월적 인식을 얻고 피안으로 떠나버린 것 같지만 폴은 마그누스 루트에서 자신은 초월이 두려워 끝내 해내지 못했다고 밝히고, 그 후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에아몬을 도우며 그 제자로 있는 것 같다. 마그누스는 자신의 굿엔딩에서 이에 성공해 비비안을 따라간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쉽지만 그 뒤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스팀의 제품 설명에는 에피소드식 어드벤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비비안과 마그누스편을 2개의 에피소드로 본 것인지, 아니면 여기까지가 에피소드 1이고 이후 에피소드가 이어진다는 이야기인지는 명확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이게 후속작이 존재하는 에피소드 1인지 아니면 이대로 단품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텐데, 카오스 게임즈 그룹은 현재 아케르 페른의 후속작을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런 만큼 이하 신흐로니자치야가 단품으로 완결된 작품이라는 전제 하에 바라본다면...

 

신흐로니자치야는 분명 아케르 페른보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뉴에이지 사상에 영향을 받은 듯한 복잡한 SF 배경이나 접점을 가진 2개의 독립된 스토리를 통해 하나의 줄거리를 완성시킨다는 컨셉은 분명 매력적이고, 그래픽은 비비안 루트에서 좀 성의없는 CG가 가끔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해진 인상이며, 더빙의 질과 사운드 믹싱도 전작에 비해 크게 개선되어 듣기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나 1회차가 5-6시간 내에 끝나는 길이에 다른 엔딩들까지 탐색하더라도 10~12시간 정도로 끝나는 분량인데 스토리는 둘로 쪼개져 있다 보니 급전개가 심하다. 발단에서 전개가 시작되려는 차에 위기 절정 건너뛰고 바로 결말로 향해가는 느낌.

 

비비안 루트에서는 새롭게 발견된 행성을 탐사하며 누가 그 행성에 먼저 정착했고 왜 그들이 사라졌는지 궁금해질 만한 타이밍에, 마그누스 루트에서는 재활치료를 끝내고 물건을 사러 갔다가 기계에 쫓기고 대체 왜 마그누스가 타게팅되었는지 궁금해질 만한 타이밍에 중간에 있을 법한 전개를 전부 생략하고 에아몬이 등장해 진상을 밝혀버리니 지금 내가 뭘 읽었는지, 내 독해력이 모자란 건지 의문이 들게 하는 것. 만약 이게 다음 에피소드로 이어지기 위한 서장일 뿐이라면 모를까, 이 상태에서는 무리하게 도중에 끝내버린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작의 대화 70% 정도는 사회에 대한, 사랑에 대한, 시간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실존에 대한 철학적인 문답과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다행히 그 내용이 유치하거나 하진 않고 진지하게 사변문학을 비주얼 노벨로 시도한 듯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이걸 떠받혀야 할 플롯이 취약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느낌. 이건 이렇게 끝내기보다는 더 길고 완성된 작품이었어야 할 것을 이런저런 이유로 잘라내고 최소한만 남기되, 시나리오 라이터가 작품의 핵심이라 생각한 이 철학적인 내용을 제거하길 거부하며 이런 식으로 완성된 게 아닐까 생각도 든다. 상상일 뿐이지만.

 

스페라가 그대와 함께하길. Sfera z tobą.

 

 

아케르 페른

아케르 페른 (2020) 2016년에 활동을 개시한 폴란드의 인디 서클 카오스 그룹 게임즈(Chaos Group Games)의 주브나일 어드벤처/코미디 일상물 비주얼 노벨. 좋게 말하면 주브나일, 나쁘게 말하면 중2병

ludonom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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