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War: Chains of Olympus

갓 오브 워: 체인 오브 올림푸스 (2008 PSP)

 

시리즈 자체가 워낙 유명한 만큼 생각은 있었는데, 유럽판 비타를 사며 다운로드 링크가 딸려오길래 일단 있는 걸 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비타의 1, 2편 리마스터 합본을 살까 생각하며 진행했다. 소니 퍼스트파티 3인칭 액션 어드벤쳐 게임. 처음엔 브롤러에 가깝나 싶었지만 퍼즐이나 플랫포밍 요소가 제법 들어가 있는 만큼 모호하게나마 액션 어드벤쳐라고 부르는 게 제일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아티카의 해변에서 쳐들어 오는 페르시아군과 싸우는 걸로 시작하는데, 조작도 타이트하고 적들을 쓸어대는 과정도 즐거우며 퍼즐 요소도 게임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조절되어 페이스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다만 혀를 차게 만든 건 첫 보스전. 첫 보스부터 라스보스까지, 제대로 싸웠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혔다 싶으면 QTE 이벤트를 성공시키거나 무슨 기믹을 발동시키던가 해야 하며, 버튼을 잘못 누르거나 기믹을 발동시키는데 실패하거나 하면 보스는 일정량의 HP를 회복하고 해당 파트를 다시 클리어해야 한다. 난 이게 이해가 안 가는데, 어느 리뷰를 살펴봐도, 심지어 유투브 게임 리뷰계의 모두까기 인형 얏지마저도 이 게임의 액션성에 대해 "satisfying to the point of eroticism" 이라고 극찬하는 걸 보면 내가 정신이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만, 덕분에 보스전이 재미없고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막타를 컴퓨터에게 빼앗겼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 문제는 QTE야. 난 QTE가 정말 싫어. 난 QTE를 재미있는 게임 메카닉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는 머저리들이 예산과 기한에 시달려 만들다 만 게임을 다 만든 게임인것처럼 억지로 포장할 때나 쓰는 쓰레기같은 메카닉이라고 정의하고 싶을 정도니까. 근데 이 게임은 자코들과 싸울 때나, 보스전에서도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가드해가며 HP게이지를 까내리는 과정까지는 타격감도 좋고 재미있는 것 같지만 꼭 막판에 QTE를 던져 강력한 보스에게 막타를 날려 쓰러트리는 순간의 즐거움을 박탈해버린다. 화면에 표시되는 버튼을 타이밍 좋게 맞춰 누르는 게임은 리듬액션으로 충분해.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하면 별의 별 게 다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는데, 거대한 괴물들이 적으로 나오면서 카메라를 가로막아 주인공 크라토스가 어디있는지도 안 보이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카메라를 조작할 방법이 없는 것부터 (이건 PSP의 한계라 어쩔 수 없지만) 문짝 하나 여는데 O버튼을 15번은 연타해야 하는 조작까지. 물론 어디까지나 사소한 부분들이고, 그래픽, 사운드, 조작의 반응성 등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은 게임임은 분명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스토리 진행의 컷씬은 짧게 유지되어 템포를 끊어먹지 않으며 (하술할 이유로 이 스토리가 길게 늘어지기라도 했다면 바로 쿠소게 취급했겠다만) 총 플레이 볼륨이 짧은 정도가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UMD에 이정도 우겨넣은 것도 충분히 대단하다.

 

 

 

스토리 이야기로 넘어갈까. 자세한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메리수 자캐팬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이나 세계관에 대해 어느 놈이 팬픽을 쓴 건 좋은데 그 팬픽의 메리수 주인공이 원작의 인물들을 다 털고다니는 걸로 모자라, 본래 세계관의 설정들이 무시되고 캐릭터 붕괴까지 일으키고 있다면?

 

게임을 시작하면 아티카의 해변에서 쳐들어 오는 페르시아군과 싸우는 걸로 시작하는데,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했다는 정도는 주워들었지만 아- 그래, 페르시아 전쟁이 배경인가? 거기에 바실리스크가 등장하고, 그렇군, 이런 식으로 판타지 요소를 섞어서 게임으로 만들었구나, 이거 괜찮은데? ...싶었으나. 일단 그리스 신화의 절대적인 룰 몇 가지를 설명하고 넘어가자.

  • 운명이 결정한 내용은 신이라도 바꿀 수 없다. 운명은 제우스가 영원한 신들의 왕이라고 결정했으며, 이는 영원히 불변한 결정사항이다.
  • 신은 불멸하고, 인간은 필멸한다. 티탄들이 타르타로스에 갇혀있는 건 그들도 불멸자기 때문에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불멸자는 죽을 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
  • 신은 인간의 거역을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징벌한다. 아슬아슬한 예가 있다면 프쉬케가 유일하다.

이상을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보면 본래 마이너 캐릭터인 모르페우스를 내세워 태양신 헬리오스가 하데스로 끌려가고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걸 무력하게 지켜보며 크라토스에게 일임하는 걸로 모자라 마지막엔 여신과 맞짱을 떠서 격파하는 이 미친 초전개가 당황스러울 뿐이다. 도중에 아테나가 잠시 등장하는데, 아테나는 항의하는 크라토스에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고압적인 자세만 취할 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아테나는 페르세우스나 헤라클레스에게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며, 오딧세이아에서는 오딧세우스와 일시적으로 행동을 같이 해 주기까지 하는 "영웅들의 수호여신"같은 존재란 걸 생각하면 미스캐스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신들을 대하는 크라토스의 태도에도 문제가 많다. 신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건 크라토스만이 아니라 그리스 비극의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그리스의 신들이 인간에 대해 단 한가지 용납하지 않는 게 있다면 개기는 거다. 신들 눈앞에서 찌질대거나 하소연하거나 원망의 말을 하는 건 몰라도, 그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굴거나 감히 신에게 도전하는 건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주인공이 끝에 가서는 어느 메이져 여신과 1:1 맞다이를 떠서 이겨버린다. 크라토스는 인간이잖아? 희랍 신화의 세계관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상기했듯 모르페우스든 그 문제의 라스보스 역할을 맡은 여신이든, 그 누구든 제우스에 도전하여 제우스와 올림푸스 신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세계관이 원래 그렇다. 제우스는 영원한 신들의 왕으로 군림할 운명인 거고, 희랍 신화에서 신부터 인간까지 누구든 거스를 수 없는 게 있다면 운명이다. 그리고 단순히 능력만으로 놓고 생각해 봐도, 이 게임에서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세계에 빛을 비추지 못하여 올림푸스의 신들이 약해지고 세계가 멸망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제우스는 (자기보다 까마득히 선대의 여신인) 대지모 가이아와 그 자식들인 기간테스들과의 전쟁에서 전략적인 이유로 직접 헬리오스, 에오스, 셀레네로 하여금 지상에 일제 빛을 비추지 못하게 금지한 일화도 있을 정도기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한다고 이들이 약해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카의 기간토마키아 기록에 등장한다)

 

거기에 그 여신은 엔딩에서 소멸했다고 하는데, 고대 희랍인들이 인간을 부른 말이 "필멸자"라면 상기했듯 신들은 "불멸자"다. 신은 죽을 수도 소멸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인 거고, 문제의 여신이 제우스에게 반기를 든 죄로 나중에 타르타로스에 갇혔거나 봉인되었다면 모를까, 소멸했다고? 차라리 다스 베이더가 개심해서 사회봉사 하는 스토리가 더 어울린다.

 

그렇게 스토리 진행하면서 별의별 생각이 들며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그리스적인 요소를 잘 살린 부분이 단 한 곳 있다. 세계의 운명과 자기 딸 칼리오페 사이에서 크라토스는 칼을 내려놓고 딸을 선택하는데, 달리 흠잡을 데 없는 영웅이 인간적인 결점(flaw)로 인해 파멸하게 되는 그리스 비극의 lose-lose 딜레마를 잘 재현한 부분이다. 다-만- 그 뒤에 그걸 뒤엎고 여신이랑 맞다이 떠서 쳐바르는 초전개로 이어진 게 문제지.

 

그냥, 차라리, 이런 뻘짓 하지 말고 그냥 페르시아군을 악역으로 만들어서 초반에 나오는 바실리스크같은 괴물을 때려잡거나 하는 정도의 스토리였다면 훨씬 말이 되는 전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들 얼마나 많아. 응, 딱 이 게임 초반에 나오는 적들처럼 말야. 이 페르시아 침공 스토리는 첫 파트를 지나면 그냥 잊혀져 버리는데, 이 도입부에서 스토리를 끌어 이어나가거나 하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냥 판타지 세계관이었다면 그 세계에서는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납득할 수도 있었던 걸, 어설프게 희랍 신화 세계관을 빌려와 이런 식으로 모독적인 전개로 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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