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억년 이야기: 머나먼 에덴으로 (1992 SFC)
1992년 에닉스에서 발매한 SFC용 액션RPG. 사실 RPG적인 요소가 많이 약해 액션 어드벤처 정도로 봐야 하나 싶기도 한데, 대충 경계선쯤에 있다고 하고 넘어가자. 개발사는 Almanac인데, 마땅한 정보가 안 나오기도 하고 여러 홍보물에도 에닉스의 이름만 보이니 법인이 따로 존재하는 개발팀 같은 느낌일까.
46억년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게임은 1990년 PC-98용 46억년 이야기: THE 진화론과 2년 뒤에 발매된 슈퍼패미컴용 머나먼 에덴으로의 두 가지이다. 두 게임은 기본적인 플롯의 모티브를 공유할 뿐 시스템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며, 여기서 다루는 건 SFC용. 일본에선 여전히 묻혀 있는 느낌이지만 양덕들 사이에서 당대엔 안 팔렸지만 나중에 재조명받는 슈퍼패미컴 '숨겨진 명작' 목록에 자주 올라오는 게임인데, 그렇게 처음 이 게임을 접했을 때는 일본어가 아직 편하지 않았던 것도 있어 영문판을 먼저 플레이했고 덕분에 지금도 이 게임은 영문판이 더 편하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초두효과란 거겠지.
제목은 46억년 이야기지만 46억년분을 플레이하는 건 아니고, 어류까지의 진화를 마친 상태에서 시작하며 각 시대의 보스를 쓰러트리면 다음 시대로 이동하게 된다. 게임은 총 5개의 시대로 나눠지며, 각각 다수의 서브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반으로 가면 미로도 등장하지만 대체로 좌에서 우로 이동하는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오버월드에서는 자유롭게 이동하는 게 아니라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며, 각 스테이지는 횡스크롤 플랫포머인 슈퍼마리오식 구성에 HP와 스탯요소를 추가해 RPG화한 느낌. 제1장에서는 어류로 시작, 제2장에서 양서류, 제3장에서 파충류가 되며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조류가 될 수 있고 신생대를 다루는 제4장에 들어서면 그대로 파충류나 조류로 남을 것인지, 포유류가 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시나리오상 유 단위의 진화가 발생하면 전단계의 강화와 그동안 모아둔 진화 포인트는 전부 리셋된다. (사실 진화는 이런 식으로 발생하지 않지만 '성장'을 진화라고 우기는 포켓몬보다는 나으니 넘어가자.)
도중에 등장하는 다른 크리쳐들을 죽이고 잡아먹는 것으로 진화 포인트를 얻을 수 있으며 이걸 모아서 몸의 파츠를 따로따로 진화시키며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 어류 상태에서는 꼬리나 지느러미를 강화시킴으로서 민첩성을 늘릴 수 있고, 턱을 강화시키면 당연히 물어뜯는 공격력이 올라가는 식. 초기의 진화 옵션은 대부분은 스탯 +1과 +3처럼 선택으로서의 의미가 없이 단순한 강화에 가깝지만 게임이 진행되면 유의미한 진화 선택지들이 제시된다.
4족보행 상태에서는 작은 적들을 처리하기 좋지만 2족보행이 되면 점프력이 좋아지고, 목이 길어지면 리치가 길어지는 대신 반응속도가 떨어지는 식. 가장 큰 선택지는 상기한 대로 신생대에 들어가며 파충류나 조류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포유류가 될 것인지. 파충류나 조류로 남으면 기존의 진화강화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포유류가 되면 4장 초반에 매우 약해지지만 이 게임의 최종테크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어느 시점에서든지 현재 형태를 기록하고, 이후에 제한적으로나마 과거의 진화형태를 다시 불러올 수도 있다. 어류 형태를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물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스테이지에서 이걸 불러와 사용한다던가 하는 게 가능한 식. 보스전에 들어갔는데 날아다니는 걸 맞추기 힘들다면 조류 형태를 기록했다가 불러올 수도 있으나 항상 사용할 수는 없고, 게임 내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초록색 크리스탈을 필요로 한다. 어디까지나 가능하다 뿐이지 반드시 이 기능을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다른 크리쳐들을 쓰러트려 잡아먹으며 진화 포인트를 얻고 그걸로 각 파츠들을 강화시키면서 주인공을 강화시키게 되는데, 어떤 내용이든 진화를 한 번 시킬 때마다 HP가 최대로 회복되기 때문에 최강의 조합을 완성시켰다고 하더라도 진화 포인트를 어느 정도 모아둘 필요가 있다. 이 게임에서 보스전에서 HP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남은 진화 포인트가 곧 잔기인 셈. 이 게임의 포유류 최종테크인 인간에 도달하면 다른 파츠의 진화는 불가능해지지만 몸을 크게 한다 / 작게 한다는 옵션은 유지되기 때문에 계속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보스전을 벌이게 된다. 일단 인간이 되었다면 몸의 크기를 바꾸는 데 1500포인트가 소비되는 만큼 잔여 진화 포인트/1500 = 잔기수가 되는 셈.
잔기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물론 HP가 0이 되기 전에 진화를 해서 회복시켜야 한다. 일단 0이 되더라도 1초 정도의 유예가 주어지는 만큼 그 즉시 진화를 하면 회복될 수 있는데, 그 타이밍을 놓쳤다면 게임오버되어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진화 포인트가 절반으로 깎이고, 이는 회복가능한 회수가 절반으로 깎인다는 걸 의미하며 그만큼의 진화 포인트를 벌기 위한 노가다가 필요하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오버월드에서는 어디가 보스전이고 어디가 자코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스테이지에 들어가기 전에 꼬박꼬박 세이브를 하는 게 좋다.
시나리오 진행은 단선적이지만 숨겨진 요소들이 많고, 선택지에 따라 페이크 엔딩을 보게 되기도 한다. 대부분은 오마케 요소에 가깝고, 게임 내에서 대부분 관련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외부 공략정보를 참고하지 않아도 꼼꼼히 한다면 대부분 밝힐 수 있을 것인데, 예외적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합은 힌트가 (완전 노힌트는 아니지만) 부족하다. 물론 인간 안 되어도 게임 깨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인간이다 보니 인간 하고 싶잖아? 제4장 이후 고양이턱(cat jaw), 토끼의 몸(rabbit body), 영장류 몸(ramothecus body)를 각각 진화시키면 원숭이처럼 되며 이후 '계속 진화'를 몇 번 하다 보면 현생인류처럼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애초에 진화는 세대간에 발생하는 거기도 하고, 다양한 형태를 의도적으로 커스터마이징하면서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화가 아니라 지적설계이긴 하다. 진화를 소재로 만든 게임 하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건 이 게임과 스포어 아니면 심어스정도인데, 진화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비계획성을 존중하면서 그걸 게임화시킨다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걸 의식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게임에는 지구의 여신 '가이아'나, 진화의 힘을 폭증시키는 신비로운 크리스탈, 지구 생물체의 진화에 개입하려는 외계인 등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섞여 들어가 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히트판정. 적에게 공격을 받은 직후 무적 타이머가 없는데, 덕분에 몸통 박치기를 해오는 적에게 한 대 맞으면 한 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직후 충돌 판정이 많게는 2-3회 또 터지는데, 이게 평상시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잖아도 공격 한 번에 많게는 전체 HP의 1/3씩 깎아내는 보스전에서 발생하면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것. 이건 발매전에 내부에서 어느 정도 조정이 필요했을 부분일 것 같은데, 적에 따라 너무 가까이 접근해 내 공격 리치 안에 들어와서 내 쪽에서는 공격이 안 되는데 상대는 몇 번이나 충돌 판정을 일으키거나, 구석에 몰렸을 경우 속수무책으로 4-5회씩 연속으로 맞게 되거나 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한다.
어느 시대에나 만만한 크리쳐들만 나오는 필드가 있기 때문에 보스가 너무 강하다 싶으면 진화 포인트를 모아 잔기빨로 이길 수야 있지만, 자칫 실수해서 연타를 허용해 HP가 0이 되면 그 순간 남은 잔기가 절반으로 준다는 것. 단순히 적이 강한 거라면 문제가 안 된다고 해도, 시스템적인 문제로 괜히 더 어려워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럼에도 독특한 아이디어와 게임플레이, 다양한 커스터마이징 옵션을 자랑하는 게임이지만 상술한 판정문제와 잔기 노가다의 필요성 덕분에 순수히 권하기는 약간 힘들지만, 새로운 걸 시도하고 도전해 보는 모습은 호감이 간다.
46억년 이야기: THE 진화론
46억년 이야기: THE 진화론 (1990) 진화를 소재로 한 에닉스의 1990년 PC-98용 턴제 RPG. 2년 뒤에 발매되는 슈퍼패미컴용 46억년 이야기: 머나먼 에덴으로와는 어류에서 시작해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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