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zû

압주 (2016)

 

Giant Squid에서 제작한 워킹... 아니 다이빙 시뮬레이터. 게임을 시작하면 다른 부연설명 없이 잠수복을 입은 주인공이 덜렁 놓인 상태에서 최소한의 조작법만 제시되고 이후 알아서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탐사하게 된다. 게임적으로는 여기저기 헤엄쳐 다니면서 인터랙트 가능한 오브젝트들을 발견하고 그렇게 다음 지역으로 가는 길이 열리면 진행하기를 반복하는 단순한 구성. 그 대신 아름답게 묘사된 바닷속 풍경을 즐기는 게 메인이다.

 

아름답게 묘사된, 이라고 했지만 사실적인 그래픽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대체로 실사감이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텍스쳐로 처리되어 현실감보다는 그냥 보기 좋은 장면을 만들기에 집중한 모습. 광원효과 등도 한 걸음 물러서 보면 비현실적이지만 그것도 의도된 이펙트라 생각하면 그럴싸하다. 

 

제목의 압주(abzû)는 수메르어로 태초의 바다라는 의미. 속설에는 영어 abyss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배경음악에 에누마 엘리시의 아카드어 가사를 채용한 곡도 있고, 도중에 곳곳에 보여지는 해저의 유적들에서 메소포타미아적인 느낌을 내고 있으며, 바다를 강조해 해상생물 모티브를 사용한 벽화가 많고 덕분에 미노아 느낌에 가까운 것도 있다. 그렇지만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고 지금 주인공은 뭘 하고 있는건지 말로 표현되는 서사가 없이 플레이어는 행동을 하면서도 스토리적으로는 그냥 지켜보는 역할에 가깝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냥 아트 디자인의 모티브를 가져왔을 뿐인 거겠지.

 

 

이머전이 깨진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작은 생선들은 충돌판정이 없이 지형을 뚫고 헤엄친다.

전체 분량 서너시간 정도로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이 놀이공원 라이드 타듯 즐기면 그만인 게임이지만 조작성이 약간 좋지 않다. 물 속에서 지상처럼 자유롭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없는 건 뭐 당연한 일이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좀 더 자연스러웠으면 싶은 느낌. 디폴트 설정으로 좌우와 상하가 반전된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조작성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는데, 옵션을 건드려보며 자신에게 맞는 조작법을 찾으면 된다. 나는 좌우는 노멀, 상하는 반전된 상태에서 컨트롤러로 플레이했는데, 아날로그 스틱이 없이 키보드/마우스만으로 플레이하면 꽤 어색하다.

 

인터랙트 가능한 오브젝트들을 찾아다니다보면 뭔가의 봉인같은 걸 해제하고 바다의 여러 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클리셰적인 묘사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우면 그걸로 된 거야. 위 스크린샷의 장면에서 작은 물고기 떼들이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그 주변을 헤엄치는데 지형을 뚫고 들어가는 걸 보고 이머전이 깨지긴 했지만 그 정도. 아니 뭐, 저걸 다 충돌판정을 계산하고 있으면 연산이 너무 무거워지겠지만 단지 지형에 접근하지 않게 만들게 하는 정도였어도 문제가 없었을텐데.

 

디어 에스더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이딴 게 게임이냐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후 4년이 지나며 비슷한 장르의 게임들이 늘어나며 '게임'으로 인정받는 소프트웨어의 범위가 예전보다 크게 넓어진 느낌이다. 분명한 규칙과 승리/패배의 조건 등 전통적인 게임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소프트웨어들은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게임 형식이어야 하긴 하다. 단순한 영상물이었다면 아무런 매력이 없었겠지. 오스트리아 빈에 살던 시기에 지하철 전광판에서 이 게임의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그 광고를 보고 게임을 구입했었으니 아마 기억이 틀리진 않은 것 같은데, AAA도 아닌데 그런 광고가 나간 걸 보면 성적도 좋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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