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onymie

요정 이야기 (정령물어)

Katiusza 2024. 7. 31. 14:05

精靈物語

요정 이야기 (1995)

 

대만의 응양(鷹揚)에서 제작한 쿼터뷰 시점의 SRPG. 원제는 정령물어로, 한국에서는 게임박스에 의해 발매되며 제목이 요정 이야기로 옮겨졌다. 팔여신이야기도 그렇고 왜 중화권 기업들이 제목에 물어를 붙이는 걸까. 일본 게임인 척 하면 좀 더 팔릴까봐? 응양은 그리 눈에 띄는 제작사는 아니지만 종합병원(풍광의원)이나 꼬마 공룡(공룡세기) 같은 게임들이 한국에 발매되기도 했다. 비슷한 제목인 요정전설탄생이나 졸업을 만든 헤드룸의 육성시뮬레이션으로 완전히 다른 게임이며, 너무 특징이 없는 밋밋한 제목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목에 원제를 병기한다.

 

스토리는 요정의 나라를 위협하는 복수여신을 쓰러트리기 위해 두거라스(度格拉斯) 및 불요정 카야(卡雅), 환상요정 씨라(希拉)와 함께 동료를 모으면서 싸우러 간다는 이야기. 위 이름들은 한국판의 오프닝만 잠깐 확인하고 그대로 가져온 것. 아마 원작자들의 의도한 건 Douglas가 아닐까 싶은데, 한국어판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음차해 옮긴 것 같다.

 

시작하자마자 요정의 여왕이란 자는 나라를 빼앗기고 도망쳐 두거라스 에게 복수여신을 막을 수 있는 건 너 뿐이라며 모든 걸 떠넘기는데...

 

 

이런 새끼가 '성스러운 요정'에 요정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그냥 망해라...

...미소녀 캐릭터들이 들어올 때마다 헬렐레거리는 90년대 싸구려 개그만화 캐릭터. 하아. 이후 전투로 들어가기 전에 인터미션에 들어가니 카야에게 말을 걸어 두 사람을 파티에 편성하고 씨라에게 말을 걸어 세이브를 할 수 있다. 전투가 시작하며 전원이 자동으로 배치되는 것도 아니고, 편성창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 이렇게 매번 동료가 추가될 때마다 인터미션에서 카야와 대화해야 한다.

 

자, 거기까지는 뭐 좋다고 치는데 퍼포먼스적인 면에서 상당히 답답한 게임이다. 화면 스크롤은 뚝뚝 끊기고, 캐릭터를 이동시키면 걷는 애니메이션 따위 없이 한 칸씩 뚝뚝 끊기며 스케이트 이동을 보여준다. UI 면에서도 마우스로 100% 조작이 가능한 건 좋은데 마우스 포인터를 캐릭터 위로 가져가거나 해도 툴팁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아군이나 적 캐릭터로 포인터를 가져가 우클릭을 하면 정보를 볼 수 있는데, HP나 MP처럼 지극히 기본적인 정보가 조작 1단계 뒤에 숨겨져 있는 건 결코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이동을 지시할 때도 타일에 하이라이트 표시가 안 들어가기 때문에 때때로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기도 하며, 지형 고저차와 합쳐져 아래와 같은 상황이 되면 매우 답답해진다.

 

 

쿼터뷰로 만들면서 커서와 툴팁이 필요한 이유. 적이 가려서 안 보이잖아

초반 한두판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난이도가 금방 올라가는 90년대식 밸런싱을 해 놓고 있는데, 거기까진 좋다고 쳐도 위의 정보량 부족이 다시 발목을 잡는다. 전투행동을 할 때마다 경험치를 입수하는 방식인데 공격을 하거나 회복을 해도 경험치 입수가 따로 메시지로 표시되지 않으며, 덕분에 조작을 하기 전에 캐릭터 일람에서 현재 경험치를 확인하고 이를 기억한 상태에서 행동을 한 뒤 다시 들어가 변동치를 확인하는 수 밖에 없다. 귀찮아. 전투중에 세이브는 가능하지만 로드가 안 되는 건 덤. 만약 로드하고 싶다면 껐다 다시 켜야 한다.

 

만약 동료 중 하나라도 전선이탈하면 그 동료의 경험치는 0으로 초기화된다. 레벨도 다운되는 것 같은 게, 레벨 2 캐릭터를 초반에 로스트했다가 다음 스테이지에 들어가려 하니 1레벨 경험치 0이 되어 있었다. 파이어 엠블렘 방식보다는 양심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적의 파워 인플레가 급격한 편에 속하는 게임이라 이렇게 되면 좀처럼 써먹을 수 없게 된다. 초기 멤버들이 계속 빌빌거리는 사이 새로 들어오는 동료들은 시작부터 다음 스테이지에 맞춰진 레벨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다 보면 파티의 레벨 편차가 심해지게 된다. 캐릭터가 늘어난다고 그만큼 육성에 사용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이 미친자들이 왜 SRPG 맵을 미로로 만드는거야 대체

게임 디자인 면에서도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다. 제작사 응양은 꼬마공룡 외에 비응기사(飛鷹騎士)라는 SRPG를 이전에 만들었고, 본작이 최소 3번째 SRPG인데도 이런 막가는 디자인을 만들었다는 게 다른 의미에서는 놀라울 정도. 위의 두 맵은 각각 스테이지 5와 스테이지 9. SRPG 필드임에도 불구하고 맵을 미로처럼 만들었는데, 팔여신이야기 2도 이런 짓을 하긴 했지만 그래픽 특성상 훨씬 줌인되어 플레이어의 시야에 보이는 필드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미니맵은 반대로 너무 줌아웃되어 뭐가 어딘지 알아보기 든 와중에 이걸 참고해가며 캐릭터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동시켜야 한다. 스테이지 9쯤 오면 동료가 많이 들어와 최대 14명을 편성할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같은 미로를 14번 조작해 이동해야 한다는 말이잖아. 미쳤어? 왜 SRPG에 미로를 만들어?

 

그나마 스테이지 5는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적도 약하고 곳곳의 보물상자를 회수하는 보너스 스테이지 느낌이었다면 스테이지 9는 플레이어 캐릭터들이 진입할 수 없는 숲 지역에 비행 속성으로 지형을 무시하는 적들을 배치해 놓았고, 이 적들은 근접전이 아니라 원거리 마법공격을 걸어온다. 숲에서 매복당하는 기분을 느껴보라는 것이겠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지극히 답답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플레이어 측의 비행유닛은 이 시점에서 단 1명밖에 없기 때문에 각이 안 나온다... 미리 정보를 알고 들어갔다면 걔를 어떻게 집중육성해 무쌍을 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으려나.

 

여기에 초기멤버로 인터미션에서 편성을 담당하는 불요정 카야가 스테이지 7부터 플레이어의 조작을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다. 완전히 AI가 되어 멋대로 돌격해 나가기 때문에 엄호하기도 힘든데, 이게 한 번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스테이지 9까지 진행해도 같은 행동을 보였다. 이게 의도한 디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뭘 의도한 건지 모르겠는데, 이 시점에서 유일한(!) 원거리 공격 가능 캐릭터인 카야가 진입불가 지역의 적들을 그나마 견제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그나마 2칸 떨어진 곳을 공격하는 게 전부라 하지만 나머지는 바로 옆이 아니면 아예 공격이 안 된다.

 

 

일부 스테이지에 있는 함정. 빠지면 1턴간 행동불능 + 데미지.

여기에 MP가 상당히 짜다. 스테이지 1 클리어 이후 동료로 참가하는 유라리스(語拉莉司)가 파티의 유일한 힐러격인데, 등장 직후에는 2, 3번 회복을 하고 나면 MP가 바닥나버린다. 레벨이 올라가면 그만큼 MP도 늘어나긴 하지만 회복마법의 치유량은 고정치라 늘어나지 않고, 유라리스의 회복량으로는 적의 파상공세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상위 회복마법을 배우면 약간 숨통이 트이지만 MP 소비량도 늘어나 이를 습득할 시점에서는 전투중 딱 1번 사용할 수 있는 수준.

 

지금까지 습득한 경험치를 보존하고 재도전하는 기능 따위는 당연히 없기 때문에 만약 재도전한다면 강제 참가인 두거라스와 1칸 너머를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원거리 멤버 카야 및 스테이지 1 클리어 이후에 동료로 참가하는 힐러 유라리스 3명에게 경험치를 집중해 몰아주는 전략이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이후 스테이지 6 이후 추가되는 단니(丹妮)가 지형을 무시하는 비행속성을 갖고 있어 유용하니 여기까지 4명.

 

총 편성제한은 14명이며, 나머지 10명은 스테이지 10부터 15사이에 딱 10명이 우르르 들어오니 이들로 후위를 채운다. 능력치에 따른 데미지/피데미지 증감이 뚜렷한 게임이기 때문에 맞을 때마다 -10, -15씩 깎여나가는 동료들을 키우는 것 보다는 -1, -2 정도의 잔기스만 나며 적들을 확실히 보낼 수 있는 멤버를 집중해 육성하는 게 오히려 유리하지 않을까. 마법공격은 고정치 데미지가 들어가니 보스에게 통상공격으로 딜이 안 박힌다 싶으면 둘러싸고 마법을 난사하면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고. ...라는 건 실제로 해 보진 않은 이론상의 전략. 아니, 이 게임 두 번이나 하고 싶진 않아. 

 

 

상점. 일부 스테이지에만 존재하며, 분명히 눈에 띄는 아이콘이나 간판도 없이 필드의 일부처럼 보여 찾기 어렵다.

여기에 간혹 필드에 보물상자들이 놓여 있고, 여기서 소비 아이템만이 아니라 공방 및 이동력 등에 보너스를 주는 장신구를 습득할 수 있다. 추가로 일부 맵에는 상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런 장신구들을 구할 수 있으니 최대한 좋은 장비를 몰아주며 버프를 몰아주는 것. 같은 장신구를 2개 장착시키면 효과가 중첩되지 않으니 주의.

 

사실 꼬마 공룡이 워낙 쿠소게인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적어도 그 다음에 나온 작품이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은 얄팍한 기대에 시작한 게임이었지만 이 역시 견디기 고통스러운 수준의 쿠소게였다. 스테이지 9까지 딱 절반을 진행하다 포기. 이걸 한국에 정발한 게임박스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지화상으로 볼 때는 쿼터뷰에 입체감이 느껴지는 맵에 기대를 하게 했지만 비슷한 시기 대만게임인 천사제국은 물론 팔여신이야기 2와 비교해도 실례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