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포 라이프 (1996)
아타리에서 발매한 마지막 재규어 게임. 버추어 파이터와 철권이 불을 지핀 3D 대전격투 붐에 올라타기 위해 1994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해서 늦어지다 1996년 1월에 와서야 발매되었으며, 이 게임이 발매될 무렵쯤 되면 아타리는 이미 재규어 서포트를 종료하고 인수합병될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라는 제목은 당시 아타리의 재무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었을까.
메인 제작자는 프랑스와 이브 베르트랑(François Yves Bertrand). 고교시절부터 게임을 개발해오다가 프랑스에서 시스템(Sisteme)이라는 회사를 세워 몇 개의 게임들을 발매했고, 이후 3D 환경에서 카메라를 조절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세가에 제안, 세가에 입사해 AM2에 소속되어 버추어 파이터 제작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베르트랑이 담당한 건 카메라 조절과 충돌판정의 제작이라고 하는 듯.
이후 베르트랑은 미국으로 이주, 아타리의 최신예 하드웨어 재규어용 3D 대전격투 게임 파이트 포 라이프의 개발을 총괄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잘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이 제작에 투입된 건 프로그래머 베르트랑 1명, 그래픽 담당 실비오 포레토(Silvio Poretto) 1명. 모션캡쳐와 일부 그래픽 작업이 외주로 돌아가긴 했으나 대부분의 작업이 지극히 제한된 인원의 손에 맡겨져 방치되다시피 했으며, 역사는 반복된다고 거의 4반세기 전에 E.T.에서 저질렀던 짓을 또 저지른 셈. 그렇게 개발이 이어지다가 아타리의 운명이 정해지고 다수의 프로젝트들이 취소될 상황이 오는데, 베르트랑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의 페이스대로 진행되면 앞으로 5개월의 시간이 더 필요했겠지만 자기 자신이 정리해고되는 걸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2달간의 유예를 얻어 간신히 게임을 발매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하던가 아니면 아예 게임이 물거품이 되던가의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거겠지.
스토리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을 관리하는 '게이트키퍼'가 자신의 심심풀이 여흥을 위해 8명의 망자들에게 토너먼트 시합을 제안, 우승자를 다시 부활시켜준다고 약속하며 시작되지만 이 스토리는 매뉴얼에만 존재한다. 토너먼트 모드에서도 매치 사이에 등장인물들간의 대화같은 건 없고 오프닝 데모에서는 제작진 크레딧이 나올 뿐 스토리는 표시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스토리 텍스트 같은 건 마지막에 넣어도 무방한 거니까 미뤄두다 결국 넣지 못했다던가 그런 거겠지.
3D 대전격투 최악의 쿠소게라고도 불리지만 사실 그 정도까지냐면 난 회의적이다. 처음 5분정도 플레이해보고 게임의 플레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소게를 단정짓는 유투버들이 세상엔 너무 많잖아. 특히 이렇게 장르가 충분히 정형화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일단 이해하고 평가를 하는 게 정당하다.
일단 그래픽은 그리 나쁘지 않다. 당장 위의 새턴용 버추어 파이터와 비교해 봐도 파이트 포 라이프가 더 많은 폴리곤을 사용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고, 배경의 퀄리티도 대동소이한 레벨. 버추어 파이터에 비하면 링이 넓고 그만큼 캐릭터들이 멀리 떨어지게 되기 쉬워 가까이 접근해 싸우는 박력감이 없긴 하다. 링은 넓은데 캐릭터가 좌우로 움직이는 게 너무 느리다는 지적도 있지만 방향키 + 회피 버튼을 동시에 누르면 그 방향으로 빠르게 치고 빠질 수 있다.
파이트 포 라이프는 가드 개념이 없는 대신 회피 버튼이 있으며 간단한 펀치나 킥은 그 자리에서 버튼만으로 피할 수도 있지만 상대의 콤보공격이나 필살기를 피해야 할 때는 방향키와 함께 회피해 거리를 띄우고 카운터를 노리는 개념의 게임이다. 3D 대전격투 게임으로서 이게 좋은 디자인인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기본 기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캐릭터 이동이 굼뜨다고 하는 건 공정하지 않지. 링이 넓고 캐릭터간 거리를 넓게 잡을 수 있는 것도 가드보다 회피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납득할 만 하다.
서로 주고받는 데미지가 너무 약해 매치가 질질 끌어진다는 평도 있는데, 이것 역시 오해다. 통상공격에 의지할 경우 실제로 데미지가 얼마 들어가지 않지만 콤보를 활용한 필살기는 꽂히면 HP의 1/4 ~ 1/3까지도 바로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 즉 본작은 서로 거리를 조절하다가 치고 들어가 콤보를 넣으라는 디자인이고, 토너먼트 모드에서 2, 3전째에 들어가 보았다면 AI도 점점 다양한 콤보기를 시도하며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에 쥐꼬리만한 데미지를 주고받으며 질질 끌어진다 불평하는 건 1전 이상 안 해봤다는 이야기다.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이해 가능한 요소로 언급할만한 건 버튼의 배치. 일단 버튼 레이아웃을 보면 사용되는 버튼은 위와 같다. 1P와 2P의 위치가 바뀔 경우 카메라가 회전하며 1P가 좌측에 놓이도록 조정되며, 상기한 대로 좌우+회피를 통해 거리를 빠르게 좁히거나 벌릴 수 있으며, 좌우 스트레이핑이 가능해 이를 이용해 공격을 피하거나 카운터의 기회를 볼 수도 있다. 추가로 공격에 사용되는 버튼이 7 8 9에 배치되어 있는데, 컨트롤러의 구조상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재규어에도 6버튼 컨트롤러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면 C B A 위에 X Y Z에 각각 배정된다. 다행히도 기본 컨트롤러 사용자들을 배려해 모든 콤보는 방향키 + CBA 만을 사용한다. (나는 USB 새턴 복각패드로 6버튼을 설정하고 스트레이프를 L/R로 맞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명백한 문제점들이다. 일단 본작에는 하단공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웅크린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통상 모션으로 공격하게 되며, 하이킥이 있기는 하나 점프중인 상대를 맞추기가 힘들다. 일단 상대가 점프했다면 카운터를 노리기보다 스트레이프든 ← + A든 해서 피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싸우기로 한다면 대부분의 공방은 중단에서 발생한다. 단순히 접근해 펀치를 날리려 하면 AI가 제법 잘 피하기 때문에 콤보기를 사용하길 요구되는 것. 거기까진 좋은데 나름 결정적인(?) 문제가 기술이 잘 안 나간다는 점인데, 이건 에뮬레이션 환경의 문제일 가능성을 고려해 판단을 유보하겠다.
두 번재는 모든 캐릭터의 기본 모션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래서는 캐릭터간의 개성이 도저히 부각되지 않는다. 토너먼트 모드에서는 쓰러트린 상대의 필살기를 습득해 사용 가능한 기술이 점점 늘어나게 되는데, 재미있는 발상이긴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필살기도 일정수를 만들어 놓고 모든 캐릭터에 똑같은 모션을 적용시켰다는 말이잖아. 내부적으로 캐릭터마다 체력이나 공격력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종보스는 확실히 맞으면 아프니 그런 시스템 자체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카메라다. 거리조절을 핵심으로 한 게임이지만 카메라가 계속해서 줌인/줌아웃하는 걸로 모자라 360도 회전을 반복하니 이래서는 거리감을 잡기가 힘들다. 대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1P가 화면 좌측에 놓이도록 재조정되는 덕분에 문제가 생기는데, 버추어 파이터나 철권도 카메라가 계속 이동하긴 하지만 1P가 좌측이든 우측이든 상관없이 나란히 보이게 하는 데서 끝나기 때문에 카메라가 본작처럼 계속 빙글빙글 회전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옵션에서 고정 카메라 옵션을 선택하면 해결되긴 하는데, 회전 카메라가 기본 옵션이기 때문에 매번 확인해줘야 한다. 이런 모드를 만들 시간에 게임을 완성했으면 좋았겠다 싶은데 이게 기본인 걸 보면 베르트랑씨는 이게 나름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리고 대전격투 쿠소게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가드 불가능 하메와자겠지. 이 게임은 대공이 없다시피하다는 특성상 점프킥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으로 클리어가 가능하며, 어느 캐릭터든 상관 없이 똑같이 가능하다. 어느 캐릭터로 플레이하든 엔딩은 변하지 않고 인게임 스토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만큼 반복 플레이를 유도할 동인도 없고. 모든 참가자를 3전 2승제로 쓰러트리고 나면 마지막에 게이트키퍼의 아들인 게이트키퍼 주니어와 싸우게 된다.
주니어와의 싸움은 2연전으로, 1차전에서 승리하고 나면 '지옥에서의 싸움이 공정할 줄 알았냐'며 강화된 버전과 2차전이 발생하고, 여기서 다시 승리하면 엔딩이 나오지만 이승으로 돌려보내주는 그런 건 원래 없었다며 너는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여기서 자기와 지내게 될 거라고 하며 끝난다. 끝내 만족스럽지 못하군. 빈약한 스토리, 차별화되지 않는 캐릭터, 거리조절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기껏 그린 폴리곤 캐릭터들이 화면에 크게 안 잡히는 문제와 빈약한 사운드 및 하메와자의 존재까지. 시도를 평가하는 것과 별개로 만듦새가 좋은 게임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뭐, 객관적으로 쿠소게인 건 분명하지만 과거 아타리의 E.T.가 그랬던 것처럼 이 게임도 개발 비화를 알고 나면 미워할 수 만은 없는 종류의 쿠소게로 느껴진다. 이 게임이 발매될 시점에는 이미 버추어 파이터, 철권, 투신전 등이 등장한 이후였으니 이 게임 특유의 디자인 요소들은 이들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해서였을까. 킥/펀치/가드의 3버튼 게임이었던 초대 버추어 파이터와 비교하면 사용하는 버튼의 수도 다양하고, 좌우 입력으로 상대에게 다가가거나 떨어지거나 하는 게 전부였던 초대 버파와 비교하면 좌우 스트레이핑을 통해 3D 공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초대 버파의 경험을 살려 발전형을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건 느껴진다.
다만 전체적으로 게임의 템포가 분명히 느린 편이고, 스테이지 사이의 컷신같은 연출의 부족 및 미완성된 밸런싱 덕분에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포장되어 발매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하는 아쉬운 작품. 베르트랑에게 충분한 인력이나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무의미한 IF일 뿐, 그는 이후 게임업계를 떠나 현재는 애플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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