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아캄 오리진 블랙게이트 (2013 PS Vita)
어느날 비타를 샀더니 똥이 묻어서 온 문제에 대하여. 일단은 아캄 오리진의 비타용 어레인지 이식같은 게임으로, 퍼블리싱은 워너에서 했지만 개발은 Armature라는 곳에서 외주로 만든 것 같다. 유럽에서 비타를 구입하면서 번들로 들어온 게임인데, 사실 매대에서 보았다면 절대로 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거치기용 AAA 타이틀을 억지로 이식해 만들어진 게임인 이상 처음부터 비타를 위해 만들어진 게임에 비교하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드물게 게임을 처음부터 재해석해 훌륭한 오리지널 게임으로 전환시키거나 기적적인 기술력으로 원작의 플레이성을 가깝게 재현하는 게임도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휴대기기 파생작들이 지뢰밭이 많은 건 누구든 동의하지 않을까. 그나마 이 게임은 표류하는 기획 위에서 최대한 열심히, 게임답게 만들려고 노력해 만들어진 우발적 쿠소게로 보이긴 하지만 결과물이 쿠소게인 건 변하지 않는다.
자, 상기했듯 거치기용 AAA 타이틀을 그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휴대기기로 옮기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슷한 게임플레이를 유지하면서 대신 그래픽이나 게임 전체의 볼륨을 희생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기기의 수준에 맞춰 아예 새로운 게임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다만 이렇게 할 거라면 아예 원작 게임의 게임플레이에서 정말 핵심적인 것만 남겨놓고 다 쳐낸 다음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지, 어정쩡하게 거치기 원작 흉내를 내려고 하다간 쿠소게 루트 직행이다. 이런 모범적인 휴대이식의 예로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게임이 있다면 메탈기어 솔리드나 툼 레이더의 게임보이 컬러 이식판. (메탈기어는 본래 MSX 시절 2D게임이었던 적이 있으니 따라갈 템플릿이 있긴 했겠지만.)
블랙게이트는 후자 루트를 택했다. 오픈월드 3D 게임을 비타로 그대로 옮기려 한다면 배경을 아캄으로 하든 고담으로 하든 상당부분 쳐내고 손바닥만한 시골동네 수준으로 스케일이 떨어졌겠지. 그 대신 블랙마스크, 펭귄, 조커에 의해 점거된 고담 시티의 블랙게이트 형무소를 배경으로 2D 메트로이드배니아 스타일을 게임을 만든다는 것까진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배트맨의 각종 가젯을 이용해 때로는 몰래 적 뒤로 숨어들면서, 때로는 정면에서 싸워가며 블랙게이트를 탐사하고 강화 아이템을 손에 넣어가면서 게임을 진행하는 것도 컨셉으로서는 좋다. 그래픽도 비타 게임으로서는 충분히 준수하고, 카툰 스타일로 만들어진 컷씬들도 충분히 새끈하게 잘 뽑혀있다.
다만... 그렇게 충실히 2D 게임으로 만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않았다는 게 문제. 하술할 문제들의 대부분은 내가 보기엔 원작 3D 게임의 요소를 어거지로 끼워넣으려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들로, 다른 게 아니라 기획 단계에서 갈팡질팡했음이 느껴진다. 쿠소게가 쿠소게가 되는 데는 다 원인이 있다.
이 게임은 실제로는 2.5D 메트로이드배니아다. 배경이나 캐릭터 모델링이 3D로 만들어진 2D 게임이라는 게 아니라, 게임의 시점 자체가 2D도 아니고 3D도 아닌 어정쩡한 시점을 갖고 있다. 보통 2D 화면에서 진행되지만, 도중에 코너를 돌거나 벽에 뚫린 구멍이나 문으로 이동한다던가 하면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그 쪽으로 돌아가는 식이고, 여기에 당연히 메트로이드배니아답게 윗길 아랫길 루트분기가 있고, 환풍구를 통해 장소 A에서 장소 B로 이동하는 식의 요소들까지 추가되기 시작하면 매핑이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스런 전개가 된다. 위로 2단 올라가서 왼쪽의 문으로 빠져나간 다음 아랫단으로 내려와 환풍구로 이동한 뒤 나와 화면에 보이는 엘레베이터를 타서 내리고 나면 방향감각이 남아나겠나?
맵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맵은 위에서 내려다본 2D 평면만을 표시하고 상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실제 게임중에는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맵상에선 목표지점과 배트맨이 같은 방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뭔가에 가로막혀 있거나 높이가 전혀 다르거나 해서 목표지점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흔하고, 기본 게임은 2D 스크롤 위에서 진행되는 만큼 대체 내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 (좌/우가 대체 동/서/남/북 어디에 대응하는가?) 당연히 모든 맵이 처음부터 밝혀져 있을 리가 없고, 바로 옆방으로 이동하고 싶은데 막혀있거나 하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할 지도 알 수 없다.
배테랑을 비롯한 각종 가젯을 사용해 루트를 개척해야 하는 퍼즐 요소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걸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디텍티브 모드로 들어가 화면을 스캔해야 한다. 터치스크린을 만지면 디텍티브 모드로 들어가고, 화면의 여러 지점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면 녹색이나 노란색으로 뭔가 조작할 수 있는 물체나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디텍티브 모드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폭발물로 바닥이나 벽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지점같은 것들도 그냥은 발견할 수 없다. 통상 화면에서는 아무런 특이사항이 없는 지점이 디텍티브 모드에서는 녹색으로 표시되고, 거기에 커서를 손가락으로 옮겨 수 초간 기다리면 분석이 끝나며 그제서야 폭파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숨겨진 요소를 찾는 게 아니라, 메인 시나리오 전개를 위해 루트를 개척하는 방법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모든 화면의 모든 구석을 체크하며 진행해야 하는 것. 여기에 백트래킹까지 들어가면 미로에 갇힌 실험용 쥐의 기분을 체험할 수 있다. 도저히 방향감각이 잡히지 않는 이 게임에서는 이미 과거에 방문했던 지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상하좌우로만 이동할 수 있는 2D 화면을 조작해서 동서남북/상하가 전부 존재하는 3D 공간을 변변한 지도도 없이 이동하는 걸로 모자라, 차라리 새로운 화면으로 들어갈 때라면 "아, 여긴 안 가본 곳이니 이쪽으로 오는 게 맞겠구나" 하며 진행할 수 있겠지만 이미 가본 화면들을 백트래킹해서 돌아가려고 하면 그냥 환장하는 것이다. 맵 화면에서 목적지를 지정하고, 진행에 필요한 방향을 게임화면에서 화살표 같은 걸로 힌트를 지정하는 정도라도 있었다면 훨씬 할 만한 게임이 되지 않았을까.
겉보기론 플래포머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이 게임엔 점프 버튼따위 없다. R버튼으로 그래플링 후크를 사용하거나 라인샷으로 넓은 갭을 건너거나 하는 식인데다, 일단 한 번 쓰러트린 적은 리스폰되지도 않기 때문에 천천히 생각하고 커맨드를 실행시키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기획 단계에서는 액션보다 퍼즐 요소를 중심으로 두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래플링 후크가 닿는 거리에서 R버튼 누르면 자동으로 거기까지 올라가는 식이어서야 플레이어의 스킬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나마 전투라도 재미있다면 액션 게임으로서는 할 만했겠지만, 그마저도 아니라는 것이 괴롭다. 대체로 아캄 시리즈의 전투 시스템을 재현하고 있으며 □로 평타, △로 회피/카운터, ○로 스턴을 쓰게 되는데, 자코가 한둘이면 길게 생각할 것 없이 □ 연타면 되고, 수가 좀 많다 싶으면 비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와 △를 번갈아 두 손가락으로 타닥타닥타닥타닥 치다 보면 알아서 끝나 있다. 물론 제작진의 의도대로 플레이하면 배트맨이 화면을 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적들을 쓰러트리는 간지나는 연출을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출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하다 보면 이미 내가 커맨드를 넣는 액션 게임이 아니라 화면의 지시대로 따라가는 QTE 게임이 된다.
차라리 그냥 평범한 브롤러로 만드는 쪽이 훨씬 만족스러운 게임플레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타격감 제로, 긴장감 제로, 그저 화면의 지시대로 버튼을 누르거나 아무 생각없이 □와 △를 반복해서 누르거나 둘 중 하나를 반복하는 게임이 된다.
보스전도 결국 QTE 아니면 기믹이다. 플레이 중에 확인한 건 캣우먼(튜토리얼), 브론즈 타이거, 데드샷, 솔로몬 그런디 뿐이지만. 위 스크린샷의 브론즈 타이거를 상대할 때는 상대가 점프해 오는 타이밍에 굴러서 피하거나, 상대가 공격을 해올 때 화면에 나오는 버튼 지시사항대로 △를 눌러 카운터를 넣기를 반복하면 된다. 솔로몬 그런디는 화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돌진하는 것만 반복하는 걸 구르기로 피하면서 통로에 폭발성 젤을 설치해 타이밍 맞춰 피폭시키기만 반복하면 된다. 덕분에 처음에는 뭘 어쩌란 거냐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지만, 기믹을 파악하고 나면 그 시점에서 더 이상 전투가 아니라 QTE 컷씬이 되어버린다. 이런 게 아니라, 평범하게 공격해 오는 걸 피하거나 가드해가며 한 방 한 방 데미지를 넣는 평범한 보스전으로는 안 되나? 그나마 평범하게 싸워주는 튜토리얼의 캣우먼 전투가 그나마 넷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평범하게"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혁신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정석대로 가는 게 나았을 거라는 이야기. 결과적으로 액션게임이라고 하기엔 전투가 재미없으며, 플래포머라고 하기엔 플래포밍 요소가 없으며, 메트로이드배니아류 탐색게임으로서는 혼란스러울 뿐, 대체 어디서 게임으로서의 매력을 찾아야 할 지 모를 쿠소게.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기획 단계에서 표류한 게임으로 생각되는 게,
"비타, 3DS로 만들 거라면 이런 식의 2D 게임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캄 시리즈잖아? 아캄 시리즈의 시스템을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보자"
"우리가 뭐 레트로도 아니고, 순수 2D로 가는 것보단 3D스러운 요소를 좀 늘리는 게 좋지 않아?"
...이러다가 망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아무튼 게임을 시작하면 조커, 블랙마스크, 펭귄이 각각 점거한 3구역 중 하나를 게임 시작과 함께 자유롭게 고를 수 있 시작 시점에서는 왼쪽의 실루엣 처리된 등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스토리 진행에 따라 해금된다.
처음에는 딱히 순서와 관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펭귄이 차지한 셀 블럭을 일단 들어갔는데, 70%쯤 진행하다 보면 조커가 있는 행정구역에서 뭔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중단, 스테이지 전체를 간신히 백트래킹해서 기어나오고 나와 조커 에리어로 진격. 마찬가지로 뭐가 필요하다면서 블랙마스크가 있는 산업지구로 가라고 한다. 당연히 스토리는 그 시점에서 처음부터 새로 진행되고, 원래 있던 지역에서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위의 플레이 타임 5시간 세이브 시점에서 각 에리어 탐사도는 셀 블럭(펭귄) 72%, 행정구역(조커) 88%, 산업구역(블랙마스크) 72%. 이제 블랙마스크를 잡으러 가면 되나 싶은데, 그 다음에 이 칙칙하고 혼란스러운 게임을 다시 펭귄과 조커를 찾아서 처음부터 새로 돌 거라고 생각하면 (당연하다. 처음부터 다시 헤메야 하니까) 컴플리트 49%가 아니라 체감상 30%대로 느껴진다. 게다가 상기했듯 이 게임은 리스폰도 없기 때문에 텅 빈 공간을 그저 헤메고 다니다 우연히 펭귄이든 조커든 마주칠 때까지 뺑이치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계속할 마음이 들겠는가.
이 게임은 PC로 이식되어 스팀에도 등록되어 있는데, 거치기/PC게임을 휴대기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열화판 게임을 다시 PC에 역이식하면 이걸 PC로 플레이하는 의미가 과연 있을까? PS4나 XBO 다운로드판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마찬가지.
배트맨: 아캄 오리진
배트맨: 아캄 오리진 (2013) WB게임즈 몬트리올 제작. 시나리오 시간선상 아캄버스의 프리퀄에 해당하며, 쿠소게 아캄 오리진 블랙게이트를 낳은 원작이기도 하다. 나름 사골 시리즈인지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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