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말리
오월말리 (2015)
미국에서 MBA를 취득하고 대만으로 귀국한 뒤 한동안 백수로 지내던 하유성(何喻誠). 인도네시아에서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 만자금(萬子衿)의 초대로 자카르타로 건너가 공장의 회계로 취직하게 된다. 유성은 이미 자카르타에서 성공적인 방직공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넓은 자택에서 인니인 가정부를 두고 살고 있는데, 그 딸인 만우청(萬雨晴)은 어째선지 유성을 싫어하는 것 같다...
오월말리는 우항기륭에 이은 에로테스의 2번째 프로젝트로, 스팀에 등록된 영제는 Mayjasmine: Episode 1: What is God?. 본래의 기획은 3부작 구성이었던 것 같지만 후속작은 2024년 7월 현재까지도 소식이 없고, 따라서 여기서도 단품으로 간주한다. 중화민국 정부에 의한 2.26 학살을 다룬 우항기륭에 이어 여기서는 1998년 5월 인도네시아의 반화교 폭동을 다루고 있으며, 로리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것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내용이다. 어중간히 판타지 요소를 도입한 것 보다 그런 게 일체 없는 이런 작품의 폭력적 묘사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쉽고, 어린이까지 말려들게 되는 만큼 우항기륭보다도 강한 멘탈을 요구한다.
누가 봐도 초등학생 나이대로 보이는 캐리터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게임 시작시에는 전원 18세 이상이라는 면피성 문구가 등장한다. ...이봐요? 그 와중에 옵션에서 폰트를 선택할 때 보여지는 샘플 텍스트는 "초등학생은 최고야(小學生真是太棒了)." 숨길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초반에는 하유성이 이제 막 인니에 도착해 만씨 부녀의 집에 얹혀살며 일을 배우고 틱틱대는 우청을 달래는 나름 평온한 묘사가 이어지지만 머지않아 결국 5월 폭동이 발생하고, 하유성은 만자금이 시간을 버는 사이 딸 만우청을 데리고 우청의 인니인 친구 멜라티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게 된다. 끝내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며, 1회차를 유성 시점에서 클리어하면 2회차는 우청 시점에서 유성이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선택지는 총 8회에 걸쳐 등장하며, 처음 4개는 스토리 진행에 영향이 없이 직후의 텍스트 일부가 변하는 정도. 이후 주어지는 4개의 선택지는 선택에 따라 도중에 배드엔딩으로 분기할 수 있는데, 배드엔딩이라 하더라도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면 차라리 이게 진엔딩보다 낫다 싶은 엔딩도 있다. 2회차는 선택지가 없는 키네틱 노벨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극적인 성격인 하유성과 달리 만자금(萬子衿)은 자신만만한 성격의 사업가로, 상기한대로 자카르타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인도네시아인은 신용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유성을 당혹시킨다거나, 공장에서도 중국계 직원들과는 서글서글하게 대해주는 것 같지만 인도네시아 직원들은 그를 경계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중국계 사업가들과는 내심 잘 어울리지는 못 하는 듯 한 게 필요할 때만 같은 민족을 찾는다며 중국과 대만은 두 나라라며 화를 내기도 하고, 총통선거도 아니고 시장선거 투표를 위해 대만에 들어갈 정도로 애향심은 강하다.
사실 폭동이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광의의 화교 커뮤니티와 현지 인니인들의 관계보다 대만과 중국간 양안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아무래도 대만 게임이고 하유성, 만자금 둘 다 대만 독립론자여서 그런지 대만에 우호적인 서술이 많은데, 같은 방직공장을 하면서도 대만인인 만자금의 공장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사장이 뻑하면 호통을 치기는 하더라도 정상적인 급료를 주며 퇴근도 제때 시켜주는 걸로 묘사되는 반면 중국인 위승남의 공장은 양계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일하는 열악한 환경에 강제잔업을 시키며 직원에 대한 구타도 서슴치 않고, 급여조차 절반 수준인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에 만자금의 발언에 따르면 경쟁자를 폐업시키고 자기들이 인니의 방직업을 독점하기 위해 국가가 뒤에서 빽으로 자금을 주입하고 있다고도.
하유성은 만자금 집의 가정부를 상대로도 예의를 갖추지만 만자금은 종종 호통을 치고, 한 장면에서는 심지어 손찌검도 하는데 이를 보고 배운 제 딸도 마찬가지 행동을 보이는 걸 말리지 않는다. 만자금은 분명 차별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이는 애석하게도 1세대 이민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애초에 하유성을 초대하기로 한 것도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같은 대만인이며 중국 국적자를 포함한 외국인에게 맡길 믿음이 가지 않아서. 자수성가 사업가라는 설정에 어울리게 실력주의자, 때로는 배금주의자에 가까운 모습도 보이지만 나름의 선은 있는 것 같으며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딸 우청이 미술을 배우는 걸 좋게 보지만은 않고 있다.
이런 두 사람과 대조되는 건 대륙 출신의 사업가 위승남(魏承南). 고압적이고 노골적으로 현지인들을 멸시하는 탐욕스런 사업가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상기한대로 현지인 직원들을 가혹하게 대하며 작중에서 방화사건이 처음 발생하는 것도 그의 공장이다. 만자금마저도 저 인간은 상대하기 싫다며 하유성을 대리로 보내는데, 유성은 대만인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위승남과의 자리에서 "중국인들끼리 무슨 예의를 그리 갖추나"라는 말에 바로 "저는 대만인입니다"라고 응답, 이후 당신이 여기서 사업하는 건 공산주의를 배반하는 게 아니냐거나 이래서 역사가 짧은 대만인들은 근본이 없다거나 하는 식의 말꼬리 잡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일단 위승남은 기본적으로 악역 포지션이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다. 다른 부분은 어거지가 많기도 하지만 40년전 필리핀과 태국에서 화교 배척 정책이 몰아칠 때 너희 국가, 즉 대만은 뭘 했느냐는 것. 동남아 각국에서 반화교 정책이 생겨나기 시작한 건 2차대전 종전 이후이고, 대만이야 뭐 국부천대 직후였으니 그런 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겠지. 딱히 중국 대륙이라도 뭘 했냐면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강한 나라'가 빽으로 있어야 현지인들이 얕잡아보지 않는다는 단순한 힘의 논리는 아쉽게도 현실적이다.
하지만 위승남에게 이 대사를 시킨 건 실제 1998년에 베이징이 자카르타와의 친선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임하고 중국 국적자가 아닌 화교를 돕기를 거절한 역사를 비꼬기 위함일 것이다. 그에 반해 더 적극적으로 자국민 구출을 시도하고 이후 폭동 가담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자카르타를 압박한 건 오히려 대사관도 없는 대만이었으니까. 작중에서도 중국인 류유충(劉惟忠)이 하유성에게 폭동을 알리고 (대만 대사관은 없으니) 중국 대사관으로 가자고 하는데, 중국 대사관은 이들의 구원을 거부한 것으로 묘사된다.
본작의 인도네시아 현지인 대표라 할 수 있는 캐릭터는 멜라티. 이름의 의미는 자스민으로, 중국어로는 말리(茉莉), 제목 오월말리의 말리이다. 하유성 루트에서는 등장이 많지도 않고 폭동이 시작된 뒤에 이들을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다가 말려드는 무고한 희생자 역할이지만 만우청 루트에서는 지상에 내려온 천사이자 우청을 길들여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친구이자 멘토처럼 묘사되는 존재로, 자신을 괴롭히는 다른 학생들에게 저항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대신 화내는 유청을 만류하며 어른이 되면 세상을 더 공정한 곳으로 바꾸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 외의 주요 인물이라면 대륙 출신 중국인으로 만우청, 멜라티, 종초초 등의 화교학교 담임으로 등장하는 묘품홍(苗品紅). 온화한 인격자이자 이상주의자 포지션으로 등장해 만삭의 미혼모임에도 하유성과 플래그를 꽂는 히로인력(?)을 보이기도 하며, 만우청 루트에서는 멜라티와 함께 산짐승같은 유청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같은 대륙인들에게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인니인들에게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만자금에게는 그냥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작중에서 다른 누구보다 사회에서 소외된 듯한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완벽한 인격자처럼 묘사된다.
초반에는 제 아빠 하는 걸 보고 배워 인니인 가정부와 인력거꾼을 하대하고 중국인, 인니인들에 대한 차별적 언행을 서슴치 않던 유청도 멜라티와 친구가 되며 조금씩 교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 장면들이 때로 유청만이 아니라 플레이어를 향해 설교를 하는 듯 길게 이어져 피로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오월말리에서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는 건 대륙 출신 중국인들이다. 가장 직접적이게는 만자금의 옛 직원이자 작중에서 폭도들을 주도하는 무사(Musa)가 있겠지만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렇다할 비전이 없이 감정에 치우친 모습을 보일 뿐이고, 작품의 밉상을 담당하는 건 하유성 시점의 1회차에서는 상기한 위승남, 만우청 시점의 2회차에서는 같은 화교학교에 다니는 중국인 여학생 종초초(鐘楚楚)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만씨 부녀가 인간적인 결점은 있어도 근본적인 악인은 아닌 반면 위승남과 종초초는 각각 악덕 기업인과 오만방자한 학폭 가해자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만 여기서 끝내면 '인니인, 중국인만 나쁘게 묘사했다'는 식의 비판이 들어올까 싶어 만들어진 게 멜라티와 묘품홍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 둘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천사표로 묘사되고 있어 면피용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고, 여기에 유청이 무슨 짓을 할 때마다 이 둘이 타이르며 하는 말들을 읽어보면 플레이어에게 훈계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할 정도. 멘토 역할의 캐릭터가 있는 건 물론 문제가 안 되고 잘 사용하면 주인공의 성장을 도와주면서 플레이어에게도 더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이 두 사람은 좀 지나치게 느껴진다 싶을 정도이다.
여기에 때로는 게임의 주제가 이리저리 오가며 산만한 느낌을 남긴다. 오월말리의 가장 기본적인 갈등은 인종갈등이지만 상기한 대로 유성 루트의 처음 절반동안 인종보다는 양안문제와 대만인 정체성 문제가 더 부각된다. 우청 루트에서 부각되는 멜라니의 할례나 묘품홍의 미혼모 설정 등을 보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으면서도 반대로 여기에 대해서는 깊게 다뤄지지 않는다. 여기에 묘품홍의 학생들 중 하나로 단역으로 가끔 얼굴만 비치는 에릭은 레즈비언 커플의 입양아라는 이유로 종초초 무리의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데... 왜 이걸 보여주는 거지? 적어도 이 작품 내에서는 건 그걸 구실로 종초초 무리가 이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가 전부다.
이런 주제를 다루지 말라는 건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다만 본작의 플레이시간이 7~8시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이면서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인종갈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고 있으면 플롯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다. 작중에서 만자금이 고용한 인니인 가정부 야자(Yaja)의 시점에서 닥치라니 꺼지라니 막말하는 우청을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여주거나, 아니면 무사가 폭동을 주동하고 나서기까지의 경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던가. 주인공 하유성은 인니인들에게 평범하게 예의를 갖춰 대하는 걸로 묘사되지만 그 역시 인니인들과 교류하는 장면은 없다. 이러니 해야 할 숙제가 안 된 상태에서 딴짓을 하는 것 처럼 느껴지는 거지. 최초의 구상대로 나머지 에피소드들이 제작되었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상태에서는 에피소드 1을 단품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잖아.
비슷하게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우항기륭에 비해 많은 아쉬움이 남는데, 우항기륭이 반국민당 바이어스를 분명히 보이면서도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며 각각의 시점이 분명히 전달되고 있는 데 비해 오월말리는 그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분량 덕분에 다양한 주제를 조금씩 건드리면서도 그 어느 하나 만족스럽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하유성이든 만우청이든 나레이터 주인공이 본작의 사건들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끌려다니는 입장이라는 것도 몰입감을 낮추는 요인 중 하나.
일단 추측일 뿐이지만 작품의 타이틀 주인공이 멜라티인데 멜라티도 끝내 죽기 때문에 에피소드 2가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시계열적으로 그 뒤에서 이어지기보다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작중에서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묘사되었던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고 에피소드 1에서 스쳐 지나갔을 뿐인 다른 주제들도 더 깊게 다뤄졌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
우항기륭
우항기륭 (2014) 대만의 Erotes Studio에서 만든 비주얼 노벨. 중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최초 발매는 2014년으로, 이듬에 스팀에 Rainy Port Keelung으로 출시되었다. 1945년 대만 광복과 1947년 2.28사건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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