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onymie

스위트 풀

Katiusza 2024. 5. 19. 14:19

sweet pool

스위트 풀 (2008)

 

오랜 투병생활로 결석일수가 많아 1년을 유급하고 간신히 다시 등교를 시작한 사키야마 요우지. 때때로 고통과 함께 몸에서 피가 묻어나거나, 욕조의 물이 핏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지만 자신의 질병 때문에 환각을 보는 것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제대로 된 학창생활을 경험하지 못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가운데 유일하게 그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미타 마코토를 시작으로 야쿠자의 아들이자 학교 공인의 광인 오키나가 젠야, 말수도 적고 표정변화도 없어 위업감을 주는 시로누마 테츠오가 그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어째선지 시로누마와 오키나가는 자신이 보는 '환각'을 똑같이 인식하는 것 같은데...

 

스위트 풀은 니트로플러스의 BL 레이블 키랄 명의로 발매된 성인용 고어/호러 비주얼 노벨이다. 사야의 노래 BL버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작품인데, 실제로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묘사가 많은 작품이이긴 하다. 잔혹 묘사가 들어간 호러라는 점에서 일단 한 번 걸러지고, 다시 BL이란 점에서 더 걸러지고 나면 대체 누구한테 팔아먹을 생각으로 만들었을 지 의문이긴 한데, 덕분에 매니악한 수요가 인정되었는지 현재는 스팀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다만 들어온 건 좋지만 JAST가 발매한 스팀 버전은 성적인 장면 및 일부 그로테스크한 장면의 묘사가 삭제되어 있는데, 사야의 노래 때와 달리 본작은 그런 장면들이 동시에 플롯의 핵심적인 장면이라 통편집으로 잘라내고 나면 스토리의 구멍이 너무 많이 생겨버린다. 정 스팀이 문제를 제기했다면 해당 장면을 그냥 검은 화면으로 대체하는 정도로 안 되었을까? 여기에 2024년 5월 현재 스토어 페이지에는 여기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JAST를 통해 직접 구입하도록 유도하길 원했다면 아예 스팀에 입점할 이유가 없을테니 아마 스팀측에서 제한을 건 게 아닐까.

 

 

 

그러나 식인을 포함한 적잖은 그로테스크 묘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사야의 노래와의 공통점은 거의 전무하다. 좀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야의 노래는 세계가 핏빛의 고기덩어리로 보이는 인지장애를 겪는 주인공 사키사카 후미노리가 그에게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여지는, 하지만 정상인의 시점에서 보면 유일한 비정상적 존재인 사야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을 버리는 스토리이며, 중요한 점으로 사키사카는 자신의 인지능력에 이상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 사키사카 시점에서 본다면 순애물이다.

 

그에 비해 스위트 풀의 사키야마 요우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고 그가 보는 것 역시 이상심리에서 비롯한 환각이 아니라 작중 등장하는 '내재된 존재'에 의한 초상현상을 목격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키야마는 자신을 둘러싼 기묘한 현상들을 보며 때로는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답답해하며 이해를 포기하고 몸을 맡기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분명 정상인. 스위트 풀은 그런 상황에서 조금씩 사키야마의 신체의 비밀이 드러나는 호러 미스테리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며, 순애물이라 할 만한 요소도 아주 없진 않지만 강조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많다는 피상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공통점이 없다.

 

사야의 노래의 토노 코지에 해당하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건에 개입해 진상에 다다르는 역할은 본작에서는 오키나가 부자의 야쿠자 시절 가신인 키타니 코헤이가 맡고 있다. 키타니는 작중 역할과 캐릭터성을 보면 토노 코지를 참고해 만들어진 것 같지만 아쉽게도 사키야마가 육체가 비정상이어서 그렇지 정신적으로는 멀쩡한 상식을 가진 인간인 덕분에 크게 대립관계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사야의 노래와의 비교는 여기까지.

 

 

스위트 풀의 트리거. 파란색이 이성, 빨간색이 본능이다.

공략 캐릭터는 공식적으로는 3명이지만 6개 엔딩 중 4개가 시로누마 테츠오 루트이며 미타 마코토, 오키나가 젠야는 각각 하나의 엔딩만이 존재하며 둘 다 배드엔딩이다. 사실 시로누마 루트까지 포함해 어느 엔딩으로 가더라도 해피엔딩 따위 존재하지 않지만 미타와 오키나가 엔딩이 가장 정도가 심한 배드엔딩이니 실질적으로 시로누마 테츠오 원탑의 단일 히어로.

 

작중의 선택지는 주요 장면에서 이성과 본능 중 어느 쪽을 따르는가의 형식으로 제시되며, 기획 과정에서 서로를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트로플러스에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카오스 헤드의 트리거 시스템과 유사한 느낌이다. 이 도중 선택지 대부분은 선택 직후의 텍스트가 약간 달라지는 정도 뿐이지만 기존에 고른 선택지에 내용에 따라 특정 지점에서 선택지가 등장하거나 등장하지 않거나 할 수 있고,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오키나가 젠야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본능'을 고르면 오키나가 루트
    • 오키나가가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고 전부 본능을 고른다
      • 내적인 존재가 '우리를 받아들이겠는가'라고 물을 때 이성인가 본능인가에 따라 순성 or 키타니 엔딩
  • 미타 마코토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성'을 고르면 미타 루트
    • 미타가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고 전부 이성을 고른다
      • 최초 플레이시 동거 엔딩 
      • 다른 모든 엔딩을 본 뒤 추가되는 수영장 선택지에서 이성을 고르면 기억상실 엔딩

요는 이성이든 본능이든 계속 하나만 선택하되, 오키나가나 미타 루트로 가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만 반대로 찍어준 뒤 마지막 선택지에 따라 엔딩이 갈라지는 것. 도중에 이것저것 섞어서 찍을 경우 아마 더 많이 찍은 쪽으로 루트가 정해지는 게 아닐까. 도중 갈라지는 오키나가, 미타 배드엔딩 루트를 제외하면 이성 루트든 본능 루트든 결국 90% 동일한 전개로 가다가 엔딩만 달라질 뿐이라 처음 한 번을 플레이한 뒤에는 스킵해가며 엔딩 회수작업만 남는 건 많이 아쉽다.

 

 

 

사실 스위트 풀은 '내면의 괴물' 클리셰를 따르는 다소 평범한 플롯을 보여주지만 다른 유사작들과의 차이라면 끝내 내면의 괴물을 억제하지도 못하고, 그것과 공존하지도 못한다는 점. 사키야마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존재에 의해 비슷한 존재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페로몬을 발산하게 되며, 작중에 동성애자가 없음에도 초자연적-본능적인 이끌림에 의해 주인공에게 끌리며 주인공도, 주변인물들도 이를 이겨내지 못하는 걸로 묘사된다.

 

여기에 작중의 모든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내재된 존재'도 그저 번식을 위한 본능에 따라 사키야마의 주변의 다른 숙주들을 끌어들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뭐가 없고, 이들을 숭배하는 교단도 작중의 설정상 사키야마에게 위해를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키야마를 애지중지하며 시로누마와 이어지게 만들기 위한 큐피드 노릇을 하고 있고, 그 중심에 있는 사키야마도 공포에 휩싸이기보다 대체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의연한 태도를 이어간다. 가끔씩 나오는 핏빛 살덩어리들이 아니었으면 이게 호러인가 싶기도 한데...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주인공 사키야마 요우지라는 캐릭터가 겪는 현상들을 사춘기 소녀들이 겪는 현상과 대입해 보면 어떨까. 그가 '피'와 '살점'을 흘리며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황해하는 모습을 초경의 트라우마에 대입하면 대강 아귀가 맞고, 여기에 자기보다 강하고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수컷'이 자신의 '몸'에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사키야마가 느끼는 본능적인 끌림과 두려움 사이의 갈등은 사춘기가 아니라 성인이 되어도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은유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좀 더 직접적으로 사키야마가 공포감을 느끼는 묘사를 늘려줬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 전체적으로는 호러나 광기보다는 체념과 우울을 느끼게 하는 다우너계. 인생이 너무 행복하다 싶을 때 플레이하면 적당히 우울해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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